Taiwan in the Eyes of Korean Castaways in the 18th Century Based on the Sea Voyages of Yun Do-Seong and S... - 政大學術集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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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서론 2. 문자 겉과 속이 다른 대만의 모습 3. 결론 2017, 第四十七輯, pp.♣~♣

18세기 조선 표류인의 눈으로

바라본 대만(臺灣)의 겉과 속*

-윤도성(

尹道成

)과 송완(

宋完

)의 표류기를 중심으로

진경지(陳慶智)** [국문초록] 대만(臺灣)이란 지명은 조선 숙종 8년 청나라와 정금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주본(奏 本)에 일찍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해금 정책을 실시한 데다가 대만은 절해의 외 딴섬이었기 때문에 대만과 조선의 실질적인 교류는 없었고 조선은 중국의 관원과 문인, 유구(琉球)나 안남(安南)의 사절을 통해서 대만의 대략적인 소식만 알 수 있었다. 1729년 윤도성(尹道成) 일행 30인이 제주에서 육지를 향해 배를 띄웠다가 불행히 풍랑을 만나 대 만에 표착했다. 9개월의 시간이 걸려서야 복건성(福建省), 소주(蘇州) 등지로 해서 북경에 도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돌아갔다. 이러한 험한 여정이 문자로 기록되어 1732년 정운경(鄭運經)이 편찬한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에 수록되었다. 탐라 문견록에는 윤도성의 표류 기록 외에 배에 동승한 송완(宋完)의 유사한 기록도 남아 있 었다. 두 사람의 기록은 내용면에서 그 상세함의 격차가 비록 크지만 대만과 조선의 최초 민간 교류 문자 기록으로서 모두 높은 역사적 의의와 연구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상의 두 기록은 모두 외국 사람의 시각으로 실제 경험하거나 목격한 것에 대해 기록 한 것이다. 그래서 대만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기록되지 못했던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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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기록되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할 수 있었다. 이외에 기록에 현지인과의 필담 내용 도 많이 남겼다. 이러한 대화 내용을 통해서 표면에 나타난 가상(假像)이 아닌 상대방 마 음속의 실제 생각에 한 걸음 더 다가가 그 내용과 생각들을 짐작할 수 있다. 본고는 이러 한 기록에서 중요한 키워드와 내용을 찾아낸 다음에 정리와 분석을 통해서 18세기 대만 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주제어: 표류, 표류기, 대만, 탐라문견록, 18세기

1. 서론

대만( )이란 지명을 처음으로 공식 문서 기록에 남긴 것은 조선 숙 종 8년(1682년)이었다. 당시 임금에게 올리는 주본(奏本)에 정성공(鄭成 功)의 아들인 정금(鄭錦)의 사정을 알기 위해 역관을 통해 유구사(琉球使) 의 통사(通事)와 서찰을 왕래했다고 한다. 1676년 청나라 대장군 화석강 친왕(和碩康親王)이 군사를 거느리고 복건성(福建省)에 들어가 오룡강(烏 龍江)에서 정금과 크게 싸웠는데, 정금이 크게 패하여 죽은 군졸이 20여 만이었고, 남은 수천여 인만이 몰래 달아나 해도(海道)를 통해 작은 섬에 들어갔다 한다. 여기서 언급한 이 섬이 바로 대만이다.1) 대만이란 곳이 조선에 일찍이 알려졌지만 중국과 동떨어진 절해의 외딴섬이라 유사시에 만 중국 관원과 문인, 유구(琉球)나 안남(安南)의 사절을 통해 대만의 소 식을 알아볼 수 있었을 뿐, 직접 대만과의 공식적인 교류를 하는 것은 사 실상 불가능했었다.2) 항해술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과거에 동아시아의 해상 조난사고는 빈 번하게 발생했고 표류로 인해 예기치 않은 문화 교류도 자주 이루어졌었 1)  , 肅宗實錄」 13卷, 肅宗 8年 3月 2日. “琉球國使臣, 方寓於會同館. 臣等欲知鄭 錦事情, 使譯官金喜門多般探問, 喜門與琉球使通事福建人謝宣, 書札往復, 辭 頗多, 而鄭錦則丁 巳年間, 大將軍和碩康親王率師入閩, 與之大戰于烏龍江, 鄭錦大敗, 士卒死者二十餘萬, 只剩得數 千餘人, 竄入海島, 島名卽台灣, 一名東寧.” 2) 劉序楓(2014), 70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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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표류인의 전언을 통해 바다 밖의 다른 세상이 알려졌고 이방인의 눈 에 비친 낯선 풍물이 기록된 표류기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표류지이었던 대만에도 소중하고 흥미로운 정보가 아닐 수 없다. 1729년 8월에 대만 창화현( ) 대돌두(大突頭)로 동시에 표류했던 윤 도성(尹道成)과 송완(宋完)의 표류기는 바로 그런 의미를 지닌 귀중한 자 료이다.3) 본고는 이상의 두 기록을 통해 공식적이지 않은 사적인 입장으 로, 자국인 아닌 외국인의 시각으로 18세기 대만의 표면적 모습을 정리하 며 동시에 민속학적․역사학적 고찰로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시대적 의 미를 찾아내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2. 문자 겉과 속이 다른 대만의 모습

대만으로 표류했던 윤도성은 제주의 상인이었고, 송완은 제주의 관원이 었다. 윤도성은 1729년 장사를 목적으로 제주에서 육지를 향해 배를 띄웠 다가 표류했으며 함께 동승했던 인원이 30인이었다. 8월 18일에 출발해 24일 만인 9월 12일에 대만에 표착했다. 상륙한 후 그들은 통사관(通事館) 으로 인도되어, 간단한 구호 절차를 밟은 후, 복건성을 거쳐 북경에 이른 후 이듬 해 5월 20일에 육로로 조선에 돌아갔다.4) 9개월 동안의 파란만장 했던 여정은 그제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송완의 간략한 표류기에 비해 윤도성 표류기의 내용은 비교적 많고 자 세하다. 날짜별로 표류, 구조, 이송 등의 과정을 순서대로 서술했을 뿐만 3) 윤도성과 송완의 표류기는 정민(2010)이 발굴한 필사본 탐라문견록( )에 실려 있다. 탐 라문견록은 정운경(鄭運經, 1699~1753)이 1732년 제주목사(濟州牧使)였던 아버지 정필녕(鄭必寧) 을 따라와서 제주에 머물었을 때 당시 제주 도민으로 외국에 표류했다가 생환한 14인의 표류 경위를 직접 인터뷰하여 수록한 책이다. 한창훈(2012)은 탐라문견록을 자료로 하여 그 시기 제주인의 실제 체험을 통해서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표류지인 대만에 대한 언급이 없어 참고자료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4) 鄭珉(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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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중간에 발생한 문답 내용 및 풍경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이로 보아 윤도성은 표류 경위를 기록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이 두 표류기에서 키워드를 찾아내 대만의 풍물, 주체성 의식, 종교 등 실제 모습을 밝히도록 하겠다.

1) 코뿔소가 아닌 물소의 사육 역사

윤도성 일행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대만 육지에 표 류하였다. 상륙한 후 갈대숲 사이에 있는 작은 길을 따라 가다가 한 사람 이 ‘서우( )’에 멍에를 씌운 수레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고 기록했 다. ‘서우’의 크기는 보통 소의 세 배가량 되었다. 뿔은 길이가 서너 자나 되고, 색깔 은 옻칠처럼 검었다.5) 코뿔소는 무소라고 하기도 한다. 한자어로 ‘서(犀)’라고도 하며 한자사 전에는 ‘서’자를 코에 뿔난 소라고 풀이하고 있다. 아시아에 서식하는 코 뿔소는 인도코뿔소, 자바코뿔소, 수마트라코뿔소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인도코뿔소는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 자바코뿔소는 베트남, 자바 섬, 수 마트라코뿔소는 말레이 반도, 수마트라, 보르네오에 분포한다. 대만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코뿔소가 존재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코뿔소를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만에 서 농경용으로 사육된 물소를 코뿔소로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같은 기 록에 ‘서우’와 관련된 내용이 더 있다. 5) , 耽羅聞見錄 第2話. “牛大兼常牛三倍, 角長四五尺, 而色如漆.” 표류기 번역 내용은 정민 (2008)의 책을 인용함. 이후 내용의 표기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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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말과 나귀는 모두 토산이 아니라 몹시 희귀하다. ‘서우’는 아주 많다. 사철 내내 물에 몸을 담그고 산다. 혹 논을 갈거나 짐을 실을 일이 있어 물에서 나와 일할 때는 사람들이 병에 물을 담아 그 몸에 뿌려 준다. 잠시만 그쳐도 더워 숨을 헐떡이며 견디지 못할까 봐 겁내기 때문이다.6) 이상의 묘사를 살펴보면 대만 물소의 실제 양태를 묘사한 것임이 명백 하다. 물소는 보통 소와 형태가 달라 피모가 적고 뿔이 길고 크며, 발굽 부분의 관절이 발달되어 진흙 속에서도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또한 보 통 소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덥고 습한 환경에서도 비교적 잘 적응한다. 이러한 이유로 대만의 벼농사에 크게 도움이 되어 네덜란드 통치 시기와 명나라 말기부터 중국 남방과 동남아에서는 대량 수입해 사역을 시켰었 다. 조선 세종 때는 이미 물소가 힘이 세고 경작이 가능하여 조선으로 들여 올 생각을 하였으나 기후에 안 맞을까 두렵다는 기록이 있었다.7) 실제로 성종 때에는 물소를 사육하여 번식까지 시켰었다.8) 그러나 풍토가 맞지 않아 중종 이후에 멸종되었다. 사육하지 않는 대신에 수우각( )은 서 각(犀角)과 같이 계속 수입되어 약용과 장식품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거대한 뿔과 몸체, 그리고 회색 가죽, 바로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물소를 한 번도 접한 적 없었던 윤도성 일행으로 하여금 물소를 코뿔소로 착각하 게 만들었을 것이다. 6) , 耽羅聞見錄 第2話. “羊馬驢, 皆非土産, 甚稀貴. 犀牛極多, 而四時沈身于水. 或有耕作 駄載之事, 出水服役. 而人以甁水灑其身, 少止則畏暑喘不堪也.” 7) 朝鮮王朝實錄, 世宗實錄」 55卷, 世宗 14年 2月 13日. “上又曰: ‘水牛力壯, 可使耕田, 予欲奏 請易換. 但本國與中朝南方風氣不同, 恐或不盛.’ 商曰: ‘臣聞水牛耕田, 倍於常牛. 全羅道風氣, 與 南方相似, 可以畜養.’” 8) 朝鮮王朝實錄, 「成宗實錄」 101卷, 成宗 10年 2月 24日. “左承旨金升卿將司僕寺提調單子啓: ‘諸邑分養水牛, 自壬午年至今年, 息僅七十餘頭. 自今守令有能蕃息者, 請加資勸奬.’ 上問左右, 右議政尹弼商對曰: ‘雖厚賞可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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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족이 아닌 원주민들의 생활상

윤도성 일행이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을 따라 밤낮없이 흔들리다가 도 착한 곳은 대만부( ) 창화현이란 대만 서남쪽 지방이었다.9) 일행이 현지인의 조언을 따라 남쪽을 향해 갔다. 10리가 채 못 되어 촌가에 다다 라 촌 가운데로 들어갔다. 온 마을의 남녀가 모여서 일행을 보며 시끄럽 게 떠드는데, 말소리가 짱알짱알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윤 도성이 나뭇가지 끝으로 땅에다 글을 써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고 한다. “이곳은 어느 나라 어느 땅인가?” 한 사람이 나서서 이를 보더니만 또한 땅에다 썼다. “대청국( ) 대만부와 맞닿은 창화현 대돌두사번(大突頭社番)의 통사관 이다. 너희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떤 연유로 여기에 이르렀는가?”10) 대돌두사란 곳은 대돌두에 있는 원주민 부락이며 ‘번(番)’자는 생번(生 蕃)의 상대말로 대만의 고산족 가운데 대륙 문화에 동화된 숙번(熟蕃)인 평포족(平埔族)이다. 평포족이 사는 지역이 바로 창화현 대돌두란 곳이었 다. 그리고 통사란 관직은 정 씨(정성공) 정권부터 설립된 하급 관리로서 주로 원주민 말에 능통한 한족 사람이 담당했다. 통사는 원주민 부락 안 이나 근처에 살며 부역 내용을 전달하거나 통역하는 역할을 했다.11) 윤도 성 일행이 간 곳은 바로 통사가 근무하는 통사관이었으며 일행이 만났던 사람들은 한족 통사관과 평포족 원주민이었을 것이다. 9) 당시 청나라의 통치 아래에 대만의 행정 구획은 일부( ), 사현(四縣), 이청(二廳)으로 즉 대만부(臺 灣府) 아래에 대만현(臺灣縣), 봉산현(鳳山縣), 제라현(諸羅縣), 창화현(彰化縣), 담수청(淡水廳), 팽 호청(澎湖廳)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0) 鄭運經, 耽羅聞見錄 第2話. “尹道成以木梢 地書字曰: ‘是何邦何地?’ 有一人就而觀之, 亦畵 地曰: ‘大淸國臺灣府連界彰化縣大突頭社番通事館也. 爾等是何國人物, 緣何到此?’” 11) 黃叔璥, 臺海使槎錄 卷8. “社番不通漢語, 納餉辦差皆通事為之承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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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성 일행은 이름과 표류한 날짜 등의 간단한 조사를 받고 이튿날 오 후 말을 탄 사람이 수레 2~3대를 가지고 와서 일행을 나누어 싣더니, 현 ( )으로 가는 길을 따라 데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일행을 따라다니는 병 사의 복식이 상당히 특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옆에는 군사가 따라오는데, 모두 대나무로 만든 활과 뽕나무로 만든 화살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두 귀를 뚫어 사슴뿔 귀고리를 달았고, 쇠로 만든 팔찌를 두 팔뚝에 차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긴 웃옷만 입고, 바지는 입지 않았다.12) 이상의 내용에서 묘사된 장식품이나 복장의 양식은 물론이고 대나무, 사슴뿔 등 사용된 재료도 현지 원주민인 평포족의 전통과 일치한다. 한족 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이미 앞서 언급했지만 청나라 정부는 대만 현지 원주민에게 세금 납부 대신 부역을 요구하는 관례가 있었다. 따라서 창화현 관청의 요구에 따라 원주민이 호위 병사를 맡았을 것이고 윤도성 일행이 만난 원주인은 평포족일 가능성이 높다. 윤도성 일행 중 한 명인 송완도 대만의 날씨와 주택 양식을 기록으로 남겼다. 날씨는 따뜻했고, 땅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습했다. 여염집은 모두 2층의 다락집 으로 지었다. 네 계절 언제나 다락 위에서 산다. 방은 모두 갈대와 대나무로 시렁을 짰다.13) 창화현은 아열대 계절풍 기후이다. 여름에 서남 계절풍에 의해 바다에 서 가져온 습기와 태풍 때문에 강우량이 상당히 많다. 또한 여름에는 고 12) , 耽羅聞見錄 第2話. “翌日日晡, 有騎馬者, 持 三兩來. 分載我人等, 向縣路而行. 左右 從兵, 皆持竹弓桑矢, 皆穿兩耳, 懸鹿角環, 以鐵環匝兩腕, 惟長衣垂膝, 無裩袴之屬.” 13) 鄭運經, 耽羅聞見錄 第3話. “日侯暄暖, 地氣多蒸濕, 閭閻皆作二層閣, 無四時恒處樓上, 室屋全 以蘆竹搆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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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현상이 자주 발생해서 무더운 날씨가 계속된다. 뱀과 벌레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원주민들은 높은 습기로 인하여 병이 나기 쉽고 물건도 습 기로 인하여 쉽게 상한다. 따라서 땅에서 약 예닐곱 자 높이의 공중에다 현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대나무와 갈대로 2층 다락집을 가설하고 위 층에는 사람이 기거하고 아래층은 가축을 키우거나 농기구 등의 물건을 보관하는 관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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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나라에 대한 주체성 인식

창화현 관원은 윤도성을 비롯한 5명을 뺀 나머지 25명을 고을 안으로 이송한 후 윤도성 등 5명을 이끌고 배가 정박된 곳으로 가서 배에 있던 짐들을 조사했다. 관원은 마패를 보더니 괴이쩍어하며 물었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 마패를 지녔는가?” 우리가 대답했다. “관사( )가 있었던 까닭에 지닌 것일 뿐입니다.” 그가 또 물었다. “마패 가운데 어째서 명나라 때 쓰던 천계(天啓) 연호를 쓰고 있는가?” 우리가 대답했다. “그 당시에 주조한 것일 뿐입니 다.” 그 관원은 의심하면서 끝내 석연치 않아하다가 갔다.14) 마패는 관원들이 공무를 수행하며 지방으로 나갈 때 역마를 징발하는 증표로 쓰던 둥근 구리 패였다. 한쪽 면에는 연호와 연월일을 새기고 다 른 한쪽에는 말을 새겼다. 고려시대부터 역참제( )와 파발제(擺撥制) 에 의한 통신의 중요한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규제를 위하여 마패제(馬牌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그대로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 다. 그러나 윤도성 일행이 대만에 표류한 해는 1729년이고 명나라가 멸망 한 1644년과는 85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명희종 (明熹宗, 1620~1627) 연호를 사용한 마패를 쓰고 있어 대만 관원이 의심 하며 연유를 따지는 장면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윤도성 일행이 북경의 예부( 部)에서 이것저것 자세히 캐묻더니 시랑(侍郞)이라는 사람이 또다 시 와서 물었다. “오늘날 너희 나라에서는 어떤 연호를 쓰는가?” “옹정(雍正) 연호를 씁니다.” “옹정 이전에는 어떤 연호를 썼는가? 어느 해부터 옹정 연호를 썼는가?” “옹정 14) , 耽羅聞見錄 第2話. “‘爾何爲而持此馬牌者?’ 答曰: ‘有官事故, 持之耳.’ 又曰: ‘馬牌中 何以用天啓 號?’ 答曰: ‘其時所鑄耳.’ 其官員疑之, 終不釋然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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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강희( ) 연호를 썼습니다. 계묘(癸卯)년부터 옹정 연호를 썼습니다.” 이후로는 다시 따져 묻지 않았다.15) 이상의 질문 내용에서 보여주듯이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고 있는 연호, 그 이전 사용했던 연호, 심지어 청세종( ) 옹정 등극 해(1723년)까지 마치 시험 문제를 내듯이 연달아 질문을 던졌다. 정삭(正朔)의 사용이 청 나라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 목이다. 그러나 대만 차관(差官) 뇌신(賴信)이 윤도성 일행이 대만을 떠나 기 전에 대만을 소개한 내용을 보면 하급 관리와 일반 백성 간의 국가 정 체성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만은 남해 가운데 있는 하나의 큰 섬으로, 둘레가 1,000여 리가 된다. 근세까 지만 해도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지켰으나, 강희(康熙) 을해년(1695년)간에 복 건성의 군대를 크게 일으켜 와서 공격하므로 항복했다. 그 전쟁의 여파로 지금까지 도 백성의 산업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16) 이상은 뇌신이란 사람이 대만의 지리와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한 내용 이었다. 이 같은 대화 내용의 이면에는 청나라 통치 이후에 오히려 백성 이 더욱 가난해지고 생활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심층적 의미도 깔려 있다. 사실 윤도성 일행이 대만에 표류하기 불과 8년 전인 1721년에 주일귀(朱 一貴)란 대만 사람은 ‘반청복명(反淸 明)’이란 명목으로 거사하여 대만 전 체에서 무장봉기를 하고 ‘대명(大明)’이란 국호를 다시 썼다. 비록 불과 2 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청나라 정부는 대만에 잔류한 반청 세력을 없애 15) , 耽羅聞見錄 第2話. “‘卽今爾國用何秊號?’ 對曰: ‘用雍正 號.’ 曰: ‘雍正之前, 用何秊 號? 自何秊用雍正年號?’ 曰: ‘雍正之前, 用康熙秊號. 癸卯秊爲始用雍正秊號.’ 此後更不省問.” 16) 鄭運經, 耽羅聞見錄 第2話. “臺灣南海中一大島也. 幅圓千餘里, 至于近世, 猶守大明制度. 康熙 乙亥秊間, 大發福建兵來攻降之. 至今干戈之餘, 民之産業未復云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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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 1723년까지 군사 활동을 지속했다. 이는 대만 사람에게는 결코 긍정적인 여파가 아니라고 본다. 일반 백성이 청나라에 가지는 감정과 인 식은 송완의 기록을 보면 더 여실히 드러난다. 상제묘( )에 있을 때 일이다. 대만 사람이 마패 가운데 천계 연호가 있는 것을 보고 다투어 전하여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대명의 제도가 여기 에 남았구나.” 어떤 이는 탄식하면서 마패를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기색이 말과 얼굴에 드러났다.17) 송완은 상제묘에 있던 대만 사람이 명나라 천계 연호가 적힌 조선 마패 를 보고 드러난 표정을 ‘기쁘다’와‘ 그립다’ 이 두 형용사로 묘사했다. 이 는 한편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압박을 받는데도 명나라 제도를 그대로 이 어받은 것에 대해 탄복한다는 뜻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속에 아직까 지 명나라에 대한 민족 공동체 의식이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명나라 는 비록 1644년에 멸망하였지만 정성공이 남명( )18) 정권을 잇고 1662년~1683년 21년간 대만의 실제 통치를 하였다. 윤도성 일행이 표류 할 당시 청나라의 통치를 받은 지 46년밖에 되지 않아 이민족에 반항하는 국가적,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 각한다.

4) 정통 유교 문화와 다른 혼인 제도

윤도성 일행이 창화현에 있는 상제묘에 있었을 때 진사(進士)라고 자칭 한 자가 와서 글을 써서 물었다. 다음은 그 문답 내용이다. 17) , 耽羅聞見錄 第3話. “在上帝廟時, 臺灣人見馬牌中天啓秊號, 爭傳觀大喜曰: ‘大明制度 在此.’ 或咨嗟不肯釋手眷戀者, 形諸言容.” 18) 중국 명나라가 멸망한 후 명나라 왕실의 계통을 잇는 여러 왕이 화중(華中), 화난(華南) 등의 지방 정 권으로서 명맥을 이으며 청나라에 저항해 한족의 부흥 운동을 꾀하던 시대(1644~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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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나라의 법은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는 것을 금하는가?” “그렇다.” 그가 또 글을 써서 물었다. “부인네는 개가( )를 하는가?” “아니다. 그런 풍속은 없다.” “청상과부가 자식이 없으면 어디에 기대어 생활하는가?” “비록 쓸쓸히 돌아갈 데가 없어도 친척이나 이웃에 기대어 살더라도 개가하는 일은 없다.” 진사가 말했다. “아!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구나. 아름다운 풍속이 이 같은 줄은 몰랐다.”19) 사실 1757년이 되어서야 왕극첩( )이란 대만 사람이 중국 과거시 험을 통과해 진사가 되었다. 윤도성 일행이 대만에 표류한 그 해는 1729 년이라 대만에는 아직까지 진사가 없어서 상제묘를 찾아온 자의 신분이 의문스럽다. 문자를 통해 윤도성과 필담을 나눌 수 있는 것을 보면 현지 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선 사람에게 질문할 수 있는 것이 많은데 하필이면 일부러 찾아와 혼인 관련 질문만 했다는 것에 의문이 생겼다. 이에 먼저 진사란 자의 태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윤도 성의 회답을 듣고 진사는 몹시 놀라며 감탄스러운 태도로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칭찬한 것은 당시 대만 사회의 특수한 혼인 상황을 무의식중에 드러낸 것이다. 1683년 청나라가 대만 정 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나서 반청 세력을 방비 하기 위해 대만편사유우령(臺灣編査 寓令)」을 내렸다. 이 명령 때문에 대 만 해협을 건널 때마다 사전에 허락을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대만으로 갈 때 가족과 동행할 수 없고 이미 대만에 있는 사람도 가족을 데려올 수 없게 되었다. 이 명령으로 인해 발생한 첫 번째 사회 문제는 바로 남녀 성 별의 불균형 현상이다. 남다여소(男多女少)의 대만 이민 사회에서는 심지 어 결혼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형편없는 나한각(羅漢脚)이란 계층이 19) , 耽羅聞見錄 第2話. “一日稱進士者來見, 書問曰: ‘爾國之法, 同姓不許婚媾然否?’ 曰: ‘諾.’ 又書曰: ‘婦人改嫁乎?’ 曰: ‘否, 無此等俗也.’ 曰: ‘孀婦無子, 則何以依賴生活?’ 曰: ‘雖了了 無所歸者, 依居親戚及鄰里, 而無改嫁之事.’ 進士曰: ‘吁! 朝鮮乃 義之邦, 不意美俗之若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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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되어 절도나 싸움과 같은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20) 그리고 한족 여자 를 찾지 못해서 현지 원주민인 평포족과 결혼하는 것도 한족과 원주민 간 의 갈등을 많이 야기했다. 이렇듯 여자가 귀한 대만 사회 구조에서는 전 통 유교 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동본과의 혼인 문제와 이혼, 그리 고 개가 같은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진자란 자가 던진 질문 은 당시의 사회상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5) 현천상제(

玄天上帝

) 신앙에서 마조(

媽祖

) 신앙까지의 변화

윤도성 일행이 대만으로 표류한 후 굶주림과 갈증을 참지 못해 통사관 에 있는 사람한테 도움을 청했지만 다른 곳에 가야 음식을 대접할 사람이 있다는 답을 얻었다. “우리는 조선국 사람이다. 공무로 바다를 건너다가 악풍을 만나 표류하여 왔다. 굶주림이 몹시 심하니 죽과 마실 것을 나누어 주기 바란다.” 그 사람이 말했다. “이곳은 음식을 대접할 곳이 아니다. 다른 곳에 가면 절로 너희를 구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하고 대답했다.21) 윤도성 일행을 대만부로 인솔하여 지내게 한 곳은 관청이 아닌 상제묘 란 곳이었다.22) 그리고 부윤( )의 심문을 받고 잔치를 베풀어 음식을 먹게 하고는 돌려보낸 곳도 상제묘였다.23) 중국이나 대만에서는 으레 상 제(上帝)라 하면 보통 천주교나 기독교의 하느님을 이르는 말로 인식된다. 20) , 噶瑪蘭廳志 卷2, 莊․附考」, 28면. 참조. “台灣一種無宅無妻子, 不士不農, 不工不 賣, 不負載道路, 俗指謂羅漢腳. 嫖賭摸竊, 械鬥樹旗, 靡所不為. 曷言乎羅漢腳也? 謂其單身遊食 四方, 隨處結黨, 且衫褲不全, 赤腳終生也.” 21) 鄭運經, 耽羅聞見錄 第2話. “‘我等乃朝鮮國人, 因公事渡海, 遭惡風漂到, 而飢餒已甚, 願以粥 飮相分.’ 其人曰: ‘此非餽待之所, 他處自有救爾之人矣.’” 22) 鄭運經, 耽羅聞見錄 第2話. “其後七日, 自官定人率行, 至臺灣府, 住接于上帝廟.” 23) 鄭運經, 耽羅聞見錄 第2話. “因設宴餉之, 還送上帝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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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른 시기에 네덜란드 식민 통치(1624~1662)를 받았지만 기독교 신 앙이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그럼 상제묘에서 모신 신은 누구였는지가 첫 번째 의문이다. 또한 윤도성 일행을 복건성 하문( )으로 보냈을 때 불행히도 다시 해난을 당한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다른 의문 하나가 제기 된다. 바람을 7~8일 기다려서야 배를 놓아 바다 가운데로 나섰다. 사흘을 가서 또 매서운 바람을 만나 돛대와 노가 모두 부러져서 바람을 따라 떠내려갔다. 한창 위급할 때는 뱃사공이 배 가운데 모셔둔 작은 불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 다. 그 풍속이 집집마다 불상을 모셔 두었는데 배 가운데까지도 그러했다.24) 일반적으로 불상(佛像)이라고 하면 불교의 부처가 연상되는 것이 자연 스러운 일일 테지만 대만은 배에 부처를 모시는 풍습이 거의 없다. 그리 고 내용에서의 ‘작은 불상(小佛)’이란 묘사도 주의할 만하다. 도교 신앙(神 像)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 조선 사람이 모르는 신상을 불상으로 표현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럼 배에서 모신 신상은 부처가 아니라면 현재 도 대만, 중국 동남 연해 지방에서 배에서 모시는 마조신(媽祖神)25)이냐 는 질문이 생긴다. 그러나 마조 신의 별칭은 천상성모(天上聖母), 천후성 모(天后聖母), 천후낭낭(天后娘娘)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상제란 별칭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위와 같은 상황을 종합적으로 따져 봤을 때 윤도 성 일행이 상제라고 칭한 상제묘에서 모시는 신은 부처도 마조신도 아닌 중국 송나라 때부터 청나라 통치 초기까지 대만에서 가장 성행했던 현전 24) , 耽羅聞見錄 第2話. “待風七八日, 放船出洋. 行三日, 又遭猛風, 梔柁皆折, 隨風漂流. 方危急時, 水手等向船中小佛, 叩頭祈祝. 其俗家家供佛, 而至於船中亦然也.” 25) 박현규(2012)는 17세기 전반에 후금이 요동반도 내륙을 점거했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간에 이백년 동안 중단되었던 해로 사행을 다시 열었는데 선박 침몰이나 장기 표류 등 많은 위난위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해양 수호신으로 알려진 마조신의 영험함을 체험하고 천비묘를 참배하거나 마조 신 앙을 신봉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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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 신앙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상제묘에서 모시는 현전상제는 현무대제( ), 개천대제(開天大 帝), 북극대제(北極大帝) 등의 별칭도 가지고 있다. 속설에 따르면 명태조 (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 현전상제의 비호를 받고서야 원나라 적병의 추 격을 피할 수 있고 제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명성조(明成 祖) 주체(朱棣)가 일으킨 정난지변(靖難之變)26)도 현천상제의 도움이 혜 제(惠帝) 주윤문(朱允炆)을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이었다고 한다. 그때 부터 현천상제를 명나라의 호국신(護國神), 그리고 무신(武神)으로 모시기 시작했으며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민간 신앙으로까지 보편화되었다고 한 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정성공은 명나라에 남겨 놓은 해상 군사를 이끌고, 하문, 금문(金門) 등의 섬을 지켰다. 1661년 그는 대만을 공략하여 1662년 네덜란드 세력을 축출하고 반청복명의 기지를 확보하였으며 1683년까지 3대를 이어 22년간 대만을 통치했다. 명나라를 정삭으로 봉한 정 씨 정권 은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명나라의 정치 제도 뿐만 아니라 국교로도 볼 수 있는 현천상제 신앙을 이어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천상제는 북극성과 사상(四象) 중의 현무(玄武)를 상징하며, 북방을 관리하는 도교 신이다. 북쪽은 오행 중에 물(水)에 속해서 수족이나 수상 사무를 다스릴 수 있다. 따라서 현천상제는 수상 안전을 수호해 주는 해 신(海神)이기도 했다. 대만에서 해상 교통과 해상 안전에 크게 의지했던 마조 신앙이 성행하기 전에는 현천상제가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 다. 명나라 때 현천상제를 이용해 교묘하게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처 럼 청나라 때 들어서도 같은 방법을 썼다. 1683년 청나라 시랑(施琅)이 대 26) 중국 명나라 때에, 명성조 연왕( )이 황제 곁의 간신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1399년에 일으킨 난. 연 왕은 혜제를 몰아내고 1402년에 즉위하여 영락제(永 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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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정 씨 정권을 격파하고 1786년 천지회( ) 우두머리인 임상문(林爽 文)이 일으킨 사건27)을 진압한 것도 마조신의 도움을 받아 이길 수 있었 다며 이를 거듭 강조했다. 이는 청나라가 마조 신앙을 부응시키는 정책을 펼쳐 명나라의 대표 신앙인 현천상제 신앙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 후로부터 현재까지도 대만 어선에서 모시는 신상은 대부분 마조 신상으 로 바뀌었다.

3. 결론

윤도성과 송완의 대만 표류기는 현재 남아 있는 대만․조선 민간 접촉 기록 중에서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본고는 이 두 개의 기록을 통해 서 18세기 조선인이 대만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풍물, 문화 등의 내 용을 간추려 정리했다. 정리된 기록 중에 특히 대만 사람과의 필담 내용 은 더 자세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이는 담화 과정 중에는 눈으로 보이는 피상적 양태보다 사람의 심층적 심리까지 알아볼 수 있는 여러 단서를 제 공해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청나라가 통치했던 당시 대만 사회는 태 평해 보여도 필담을 통해 반청 세력이 여전히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고 명나라에 대한 동경도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기록 속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한 글자도 사실상 중대한 의의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 속에서 상제묘의 존재를 기록하지 않았다 면 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마조신을 유일한 해신으로 착각할 수도 있 었다. 이상의 예는 표류기 같은 기록 자체의 중요성을 증명할 뿐만 아니 27) 1786년 임상문이 “민심을 안정시키고 가업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무리를 모아 천지회의 난을 일으켜 장화( ) 일대를 함락하고 정권을 세워 연호를 순천(順天)이라 했다. 이후 제라(諸羅)와 봉산(鳳山) 을 함락시키고 천지회 장대전(莊大田)과 함께 대만부성(臺灣府城)을 포위했다. 다음 해 청나라 군대에 패해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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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더 나아가 민속학, 역사학을 결합한 한문학, 좀 더 확대해 한국뿐만 아 니라 해외 연구자와 공동적으로 연구하는 한문학의 중요성을 증명해 주 기도 한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陳淑君, 噶瑪蘭廳志. http://ctext.org/wiki.pl?if=gb&res=111476 黃叔璥, 臺海使槎錄. http://ctext.org/wiki.pl?if=gb&res=958430 駱芬美(2013), 被誤解的臺灣史, 時報文化. 정 민(2008),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 휴머니스트 출판사. 박현규(2012), 1621년 조선․명 海路使行의 媽祖 사적과 기록 분석」, 역사민속학 제40호. 劉序楓(2014), 「18-19世紀朝鮮人的意外之旅: 以漂流到臺灣的見聞記錄爲中心」, 石堂論叢 55 집. 鄭 珉(2010), 「從三份十八世紀朝鮮人漂流臺灣的歷史文獻講起」, 東亞漢文學與民俗文化論叢(一) , 樂學書局. 한창훈(2012), 「탐라문견록」에 나타난 제주인의 동아시아 인식과 그 의미, 濟州島硏究 제3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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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wan in the Eyes of Korean Castaways in the

18

th

Century Based on the Sea Voyages of Yun

Do-Seong and Song Wan

28)

Chen, Qing-Zhi*

Taiwan, the name of this island, became known to Koreans in as early as 1682 (Joseon Dynasty of Korea), when a memorial was given to the Korean Emperor detailing the war between the Qing Dynasty and Zheng Jing. Taiwan and Korea had made no engagement with each other at the time because the Qing Dynasty had implemented the Haijin (sea ban) policy and Taiwan was a sea island located far away from Korea. Korea generally obtained information of Taiwan through Joseon ambassadors who inquired about Taiwan from local government officials and scholars during their missions to China, or through ambassadors of Okinawa and Vietnam.

In 1729, a group of 30 people, including Yun Do-Seong, travelled inland from Jeju Island. During the voyage, their ship went off course, steering toward Taiwan. They eventually arrived at Beijing via Fujian and Suzhou after almost a period of 9 months, and finally returned to Korea after crossing the Yalu River. This gripping voyage was recorded in writing and was compiled as a part of Jeong Un-Gyeong’s “A Description of Jeju Island in 1732”. This description documents not only the voyage of Yun Do-Seong but also that of Song Wan, who was traveling on the same ship as 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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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은 2017년 3월 31일 투고되어 2017년 6월 14일 심사를 완료하여 2017년 6월 23일 게재를 확정하였음

substantially. As the earliest written account documenting the history of private exchanges between Taiwan and Korea, these two records are both historically meaningful and valuable for research purposes.

Because the two records were based on the perspectives of foreigners who either experienced or witnessed the event, they actually reflected incidents that would not have been recorded by general Taiwanese people, thus revealing the truth of such historical event. In addition, the records detail conversations that transpired with local people, providing a further understanding of the actual thought of locals rather than a superficial account of it. This study was conducted to search these records for keywords and contents as well as to organize and analyze them to produce an overview of Taiwan in the 18th century.

Key Words: castaway, Taiwan, “A Description of Jeju Island”, 18th century,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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