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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加會議經過與發表論文全文

日期: 2018 年 1 月 10 日

參加會議經過與發表論文全文

受主辦單位邀請參加會議,並發表論文。會議主要討論從情感的角度觀看國際間 的交涉過程及其問題。筆者一直以來在兩國學術界活動,因此可以說相當熟悉此 議題,透過撰寫論文及參加會議,可以了解世界各國如何看待相關問題。發表論 文〈心的戰爭:殖民地台灣的戰爭記憶與祖國想像〉,已刊登在韓國學術期刊《中 國語文論叢》(KCI)80輯(中國語文研究會,頁265-285,2017.04。) 論文全 文如下:

計畫編號 MOST 103-2410-H-004-140-MY3

計畫名稱 冷戰下台韓兩國文學風景

出國人員

姓名 崔末順

服務機 構及職

國立政治大學台灣文學研究 所

會議時間

2016 年 10 月 28 至 2016 年 10 月 29 日

會議地 點

韓國昌原

會議名稱 (中文) 「感情的政治學與國際關係」國際學術研討會 (英文)

發表題目 (中文) 〈心的戰爭:殖民地台灣的戰爭記憶與祖國想像〉

(英文)

― 식민지 대만의 전쟁기억과 ‘조국’ 상상

최 말 순1)*

목 차>

1. 서 언 ― 전쟁시기 대만에서의 군사동원 2. <운명의 인형> 내용과 인물의 심리상태 3. ‘조국’에 대한 상상과 민족 정체성의 전환 4. 결 어 ― 남은 문제

1. 서 언 ― 전쟁시기 대만에서의 군사동원

본문은 일제 말 전쟁에 동원된 항공병의 이야기를 통해 식민지 대만인의 전 쟁기억과 조국에 대한 상상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분석대상은 대만 시인이자 소설가인 蕭金堆(1927-1998)1)의 <운명의 인형>(運命的洋娃娃)이다. 이 소 설은 1948년 동인지 ≪潮流≫2)에 일문으로 연재되었지만 5기를 끝으로 정간 되어 일부만 남아 있고3)1955년 내용을 더 첨가하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영 혼의 맥박≫(靈魂的脈搏)이란 작품집4)에 다시 실렸다. 해방 후 대만 본성인의

* 台灣 國立政治大 台灣文學硏究所 副敎授.

1) 대만 문학사에서는 필명인 蕭翔文, 淡星 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潮流≫는 해방 직후 대만 본성인 청년들에 의해 성립된 문학동인 銀鈴會(1942-1949)의 잡지로 주로 모더니즘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3) ≪潮流≫에 실린 소설명은 <運命の人形>으로 1948년 秋季號와 1949년 冬季號 2회에 걸 쳐 연재되었다.

4) 蕭金堆, ≪靈魂的脈搏≫(台南:人文出版社, 1955) 이 작품집에는 <命運的洋娃娃>이외 소 설로 보이는 <吞蝕>, <風波後的微笑>, <芥川呂志中尉>, <新生>과 <山的誘惑> 등 3편의 시가 실려 있다.

문학활동이란 측면에서 이 작품이 실린 문학잡지 ≪조류≫에 대한 연구는 나와 있지만5) <운명의 인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현재 찾아보기 어렵다.

해방 후 국민당의 대만철수와 이어진 백색테러의 반공시기를 거치면서 오랜 기간 대만인 일본병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시되어 왔고 관련 소설, 구술역사 자료 등은 대부분 1960년대 후반기부터 창작, 정리되기 시작했는데 그에 비해 이 소설은 시기적으로 매우 빠른 1940년대 후반에 쓰여 졌고 게다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여 식민지 말기 태평양전쟁에 동원된 대만인의 경험과 심리상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잘 알려진 대로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서구에 대한 적극적 학습과 모방을 통해 근대국가로 성장한 일본은 초기부터 부국강병 정책을 기조로 주변 국가 들에 대한 군사적 팽창을 시도하였다. 특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전통 적 문명국인 청 제국과 백인종 러시아에 승리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향 후 자국의 내부갈등과 모순을 대외적인 군사행동을 통해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이며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로 변모해 갔다. 특히 1920년대 말의 세계적 경 제공황으로 촉발된 불안을 만주사변(1931)과 곧 이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무력침략(1937), 남진정책(1940), 나아가 서구를 상대로 한 태평양전쟁의 도 발(1941) 등 전장의 확대와 전쟁의 장기화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자국 뿐 아니라 식민 지 대만에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여6)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대만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는 황민화 운동을 전개했다. 동화정책의 종결판이라 불리는 황민화 정책은 전쟁의 추이에 따라 인적, 물적 동원의 강도를 높여갔는데 구체 적으로 종교와 사회풍속의 개정, 일본어 운동, 창씨개명 정책7), 지원병제도 5) 張瑜珊, <≪邊緣≫或≪潮流≫ ─ 從≪銀鈴會≫討論跨語一代的發生與發聲>(國立交通大學

社會與文化硏究所 碩士學位論文, 2010.07)

6)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만의 전시동원체제도 두 단계로 나누어 구축되었는데 첫 단계는 1937년 10월부터 진행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고 두 번째 단계는 1941년 1월 조직된 황 민봉공회를 주축으로 한 운동이다.

7) 대만에서는 改姓名정책이라고 부르는데 1940년 2월 11일에 실시되었고 국어상용 가정과 황국신민으로서 자질과 공공정신이 풍부한 자에 한해서 조건부로 허가하였다. 한국과의 차이는 씨(氏)를 새로 만들지 않고 성(姓)을 고치는 것이다. 이는 대만의 호구제도가 일본

등이며8), 총력전 체제하 대만소설에서 보이는 증산보국(增産報國), 대내친선 (台內親善), 종군고취(從軍鼓吹), 황민연성(皇民練成) 등의 주제9)가 말해 주 듯 물질적 측면에서 정신적, 심리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전 방위적인 동원 체제 를 건립하고 시행했다. 그중 가시적이고 직접적이며 황민화 운동의 결실을 그 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 군사동원이라 하겠다. 대만인에 대한 군사동원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1937년에서 지원병제도가 실시된 1942년 이전까지의 군 부, 군속(軍夫, 軍屬)동원과 지원병제 시기(1942-1945)의 지원병, 징병제 시 기(1945)의 대만인 일본병이며 이를 통틀어 흔히 대만국적의 일본병(台籍日 本兵)이라 부른다.10) 일본 후생성의 통계에 따르면 일제말기 전쟁에 동원된 대만인은 20만 명을 넘으며 그중 30,304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일본군의 대외확장은 러시아를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조선과 중국의 동북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육군의 북진론과 남지(南支), 즉 중국의 화남지역과 동 남아를 포함한 인도양, 태평양 지역의 여러 섬을 포함하는 남양(南洋)으로의 진출을 노리는 해군의 남진론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의 승 리로 요동반도를 획득하려던 계획이 독일, 러시아, 프랑스 3국 간섭으로 무산 되어 북진론이 좌절되자, 일시적으로 남진정책으로 선회하였는데 대만은 지정 학상 남양진출의 제일기지로 인식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만주 진출로 인해 잦 아들던 남진론은 1940년대 전쟁의 확대에 맞추어 설계한 대동아공영권 기획 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대만에 대한 진일보한 군사동원, 즉 대만청년의 전쟁참여 독촉이란 결과를 초래했다.

군부와 군속은 군사작전에 필요한 인력이기는 하지만 전방에서 싸우는 병사 는 아니며 식량, 의료, 위생 등 군수품의 운반과 비행장, 도로 등의 건설에 동

의 가(家)제도와 비슷하다고 판단한 데서 기인한다.

8) 대만의 황민화 운동에 대해서는 周婉窈, ≪海行兮的年代 ― 日本殖民統治末期台灣史論集≫

(台北:允晨文化, 1993.2)을 참고.

9) 일제시기 대만소설의 황민화 주제에 대해서는 崔末順, ≪現代性與台灣文學的發展1920-1949≫

(國立政治大學 博士學位論文, 2004.1), 316-338쪽 참고.

10) 이에 대해서는 여러 명칭이 혼재하는데, 台籍日本兵 이외에 台灣人日本兵, 台灣人元(原)日 本兵, 元(原)台灣人日本兵 등이 있다.

원된 인력과 군사상의 행정과 서무를 맡은 인력으로 징발과 징용을 통해 이루 어졌고, 주로 중국 화남 지역과 필리핀, 수마트라, 뉴기니아 등 광범한 남양지 역으로 파견되었다. 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도발로 인적 동원이 시급해지 자 이듬해 먼저 육군특별지원병제가 대만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조선보다 4년 이 늦은 것으로 대만인을 중국 전장에 투입시키는 데 따르는 위험 때문인 것으 로 보이는데 실시방법과 절차는 조선에서의 경험에 준하여 진행되었다. 첫 단 계의 실시에서 1,012명 선발인원에 지원자가 42만 6천명이나 몰리는 높은 경 쟁률을 보였다. 그 후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육군특별지원병제에서 모두 4,200여명이 선발되어 3개월의 간단한 훈련을 마친 후 전장으로 향했다. 이어 남양으로의 전쟁 확대 필요성에 의해 해군도 1943년 특별지원병제를 실시하 여 여섯 차례에 걸쳐 약 만여 명의 대만청년들이 전장으로 차출되었다. 징병제 의 실시는 1945년 대만총독부가 '황민연성소규칙'(皇民練成所規則), 즉 신병 교육의 준칙을 공포하면서 대만청년에 대해 징병검사를 실시하여 8월 15일 일 본의 투항으로 일련의 군사동원이 중단될 때까지 2만 명 이상이 현역병으로 입대하였다.

그중 대만인의 항공병 동원은 매우 특수한 경우라고 하겠는데 항공비행학교 학생은 제국의 정식군인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대만학생들의 진학은 거의 없 었다. 자료에 의하면 1938년 첫 번째 대만인 소년비행병 張彩鑑(1922-1944) 이 일본군사학교의 입학 자격을 취득하여 육군소년항공병으로 버마작전에 투 입된 이래 숫자는 많지 않지만 만주, 소련 변경에서 정찰임무를 맡거나 필리핀 전선에서 특공대원으로 생을 마감한 대만청년도 있었다고 한다.11) 본문의 고 찰대상인 <운명의 인형>의 주인공은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항공병 훈련을 받 는 인물로 실전에 배치되기까지의 군사훈련과정에서 일본군과의 차별로 인한 갈등과 심리적 모순을 상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인물의 심리상태를 따 라가며 그가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중심으로 일본과 중국에 대한 소위 '조국' 상상과 정체성의 전환과정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 한다.

11) ≪臺灣學通訊≫81(台北: 國立臺灣圖書館, 2014.5.10.), 18-19쪽.

2. <운명의 인형> 내용과 인물의 심리상태

2. <운명의 인형> 내용과 인물의 심리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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