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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 for Anti-Communism VS. People’s Revolution: The Korean War and Political Mobilization in Taiwan and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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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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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의 희망 VS 인민의 혁명 :

한국전쟁과 대만/중국의 정치동원

란스치(藍適齊)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대만에서‘한전(韓戰)’이라 일컬어 지며, 중국에서는 보편적으로‘항미원조(抗美援朝)’라 일컬어진다. 이러 한 명칭의 차이는 이 전쟁이 대만과 중국에서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 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원래 중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국민당정부는 바다 너머의 대 만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즈음에 는 중국의 내전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비록 대만은 한국

란스치(藍適齊) 란스치(Shi-chi Mike Lan)는 시카고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만 국립중정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전공 분야는 현대 동아시아 역사, 민족주의, 전쟁의 기억 등이다. 그의 최근 출판물로는“The Ambivalence of National Imagination: Defining the ‘Taiwanese’in China, 1931-1941”, China Journal, No. 64 (July 2010); “Absence of Self?Memories of the Asia-Pacific War in Taiwan”(일어 번역문), Gunji Shigaku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45, No. 4 (March 2010) 등이 있다. 특 집 논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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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은 중국과 미국의 참전 으로 말미암아 중국 내전은 물론, 이후 수십 년간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관계에 대단히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 고 있는 대만해협 양안분치(分治, 대치?)상태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조인 60주년을 맞이한 지금은 대단히 기념 할 만한 의미 있는 시각인 바,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보 고자 한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즉 1950년대에 중국의 내전이 여전히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던 즈음에 중화민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이용하여 대만사회의 지지를 동원하고 중국공산당과의 대항에 투입하였으며, 나아가 자신의 정 치적 이익을 도모하였는가? 아울러 동일한 시각에 중화인민공화국 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이용하여 정치동원을 진행하고 중국 내전중 에서의 우세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는가? 이 글에서는 우선 중화민 국 관방에서 발행한 ≪중앙일보(中央日報)≫의 보도1)를 중심으로, 대만에 있던 중화민국정부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를 정 치동원의 수단으로 삼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대만의 상황을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민일보(人民日報)≫ 등의 관영 매체의 보도와 비교하고, 나아가 대만해협 양안에서의 각자의 정치 동원 속에서 한국전쟁이 담당했던 역할을 비교하고자 한다.

‘반공’

의 희망 : 한국전쟁과 대만

사실상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대만으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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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국민정부는 대단히 불안정한 국제적 지 위에 처해 있었다. 국민정부의 대만에서의 방어, 그리고 적극적인 전쟁준비를 통해 북경정부가 곧 진행하고자 하였던 대만해방전쟁 등에 대해, 미국은 소극적인 불간섭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 한 상황에 대해 국민정부 역시 잘 알고 있었으며, 미국의 아시아정 책과 관련된 보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 발발 사흘 전인 1950년 6월 22일, ≪중앙일보≫의 제1면의 표제는 다음과 같았다. ‘맥아더원수가 대만 방어의 강화를 주장한다면, 정부의 태도 변화 를 촉구할 수 있다.’여기에 관철되어 있는 가정의 분위기는 국민정 부가 미래의 대만의 국제적 지위에 대해, 그리고 대만(중국공산당 세력에 맞서는)의 방어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이전, 대만은 풍전등화의 불안한 시국에 놓여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국민정부에게 대만정부와 민간의 사기 를 고무할 수 있는 일대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중앙일보≫의 보도는 국민정부가 대단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 도를 취했음을 보여준다. 우선 미국에 대한 관계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자. 1950년 6월 27일 ≪중앙일보≫는“한국전쟁은 극동정책 에 관한 미국 당국의 신속한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하였으 며, 이튿날인 6월 28일에는 훨씬 큰 활자체의 톱뉴스로‘미 대통령 제7함대에 대만에 대한 공격기도를 저지하도록 명령 하달’을 보도 하였다. 이후 6월 29일의 보도에서는 한국전쟁이 국민정부에게 자 신의 국제적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었으 며, 미국에 대한 태도 역시 앞에서 서술한 바의, 가정의 분위기로 가 득 찼던 불확정성에서 자신만만함으로 바뀌었음을 다음과 같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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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히 보여주었다. “대만 방위에 관한 미국의 제안을 원칙적으로 받 아들여 해군과 공군에게 공격 행위를 일시 중지하도록 명령하였으 며, 대만의 지위와 주권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와 동시에 ≪중앙일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전쟁과 반공 목표를 추구하는 국민정부의 관련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한 곳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천(陳) 원장이 국민에게 알리는 바, 반공항소(反共抗蘇)의 국책을 관철하기 위해 견인불발의 자세로 경 각심을 높이고 안일을 탐하지 말라.”(1950년 6월 29일)며칠 후의 논설은 한국전쟁의 의미를 토론하면서 다시 한 번‘안일을 탐하지 말고 견 인불발의 자세를 유지’할 것을 재차 강조하였다.(1950년 7월 3일) 이후 ≪중앙일보≫는 중화민국/대만의 정부와 민간 각계에서 북 한공산세력의 침략에 맞서는 한국을 지지하는 보도를 지속적으로 쏟아냈다. 예를 들면, ‘중화민국 노동자의 한국 지원’, ‘한국교포의 용대’및‘반공항소 후원회’의 성립 및 가두시위(1950년 6월 29일)등과 관련하여, 대만정부가 한국을 원조할 조처를 취하고 있으며(1950년 7 월 1일),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침략에 저항하는 한국을 원조할 예정이 며(1950년 7월 2일), ‘한국에 전투병력 파견’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고 있 는 중(1950년 7월 3일)이라는 등등이 보도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느 컬 럼에서는 얼마 전에 주산군도(舟山群島)에서 국민정부와 공산군의 쟁 탈전을 겪은 후에 대만으로 퇴각한 일부 군민(軍民)들이‘주산군도 전 우’의 명의로‘공비 소탕에 뜻을 두고 한국전의 참전을 원한다’는 바람을 제출하였다는 소식을 보도하기도 하였다.(1950년 7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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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들 보도가 구축한 한국전쟁은 한국/남한의 생존에 관한 전쟁일 뿐만 아니라, 중화민국 자신의 반공존망(反共存亡)의 전쟁이기 도 한 듯하다. ≪중앙일보≫에서 1950년 7월 8일 전면에 게재한 ≪ 지도주간(地圖週刊)≫의 보도가 가장 대표적이다. 첫머리의 표제는 우 선 꿋꿋한 반공입장을 강조하면서 반공세력에 대한 전승의 필연성 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문제의 철저한 해결을 위해 북한에 상륙해야 하며, 침략자는 요행히 초반의 승리를 거둘지라도 끝내는 민주국가에 의해 격퇴될 것이다.” 대만의 반공(反共)과 반격(反攻, 중국대륙의 수복)의 상징으로서의 한국전 쟁은 1953-54년 사이에 절정에 달하였다. 한국전쟁 중 발생한 14,000여명의 중국군(인민지원군)포로 가운데 반공분자, 혹은 반공적 인 포로는 1953년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향에 따라 처리하 기로 연합군측의 동의를 얻어냈으며, 아울러 1954년 1월에는 그들 을 석방하여 대만으로 보냈다. 이들 반공포로들은 즉시 국민정부에 의해‘지사(志士)’, ‘의사(義士)’등의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반공의사’ 로 일컬어졌다. 이들‘반공의사’의 출현은 국민정부에게 절호의 기 회를 제공하였는데, 국민정부는 이들을 내세워 반공(反共)/반격(反攻) 승리의 사기를 진작하였던 것이다.2) 사실 이들 인민지원군 포로‘반( 공의사’)들이 아직 한국 경내에 머문 채 대만으로 보내지기 훨씬 전에, 대만의 정부와 민간(물론 관방의 동원 하에)은 이미 이들을 크게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일보≫는 1953년 8월 27일에‘중국대륙재포구 제총회(中國大陸災胞救濟總會, 救總이라 약칭)’대표단이 한국에 건너가‘반공 지사를 위문’하였다는 소식을 보도하였으며, ‘구총’의 위문편지 전 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 간행물에서는, ‘반공의사’는“조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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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히 사랑하는 사나이요, 충정불굴(忠貞不屈)의 지사이며, 그대들의 위대한 반공정신은 우리 중화민족을 위하여 한없는 영광을 쟁취하 였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앙일보≫는 또한 대만의 각계 인민이 이들‘반 공의사’를 얼마나 기쁘게 맞이하는가를 거듭 보도하였다. 즉“대만 의 온 인민단체는 반공의사의 대만행을 지원하고 월례회를 동원하 여 후원회 조직의 결의를 통과시킴과 아울러, 위문전보를 보내 귀환 을 환영한다”(1953년 9월 20일)가 그것이다. 이외에도 글과 사진이 잇달 아 보도되었는데, “어제 각계 대표가 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에 있는 반공의사를 돕고 위문편지를 보내며, 위문품 모집을 확대하고 공산 당의 세뇌음모를 폭로하다”, “국내외 동포는 한마음으로 한국에 남 아 있는 의사의 귀국을 지원한다”(1953년 9월 27일), “각지의 군인, 공무 원과 학생의 기부 열풍이 일어나고, 반공의사를 위해 방한복을 만들 다”(1953년 10월 8일)등등이 그것이다. 이들‘반공의사’가 1954년 1월 대만에 도착했을 즈음, 국민정부 가 이를 증거로 삼아 얼마나 자신의 반공 승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 였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당시 중화민국의 주한(駐韓)대사는 연 합군측에 다음과 같은 의사를 전달하였다. 반공의사의 자유 쟁취는 “자유가 반드시 노예를 물리칠 수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장차 쇠 창살 아래의 인민들이 폭력 통치에 반항하게 만드는 커다란 희망과 격려를 획득하였다. 의사의 불굴의 의지는 쇠창살 아래의 폭력 통치 가 이미 붕괴될 위기에 이르렀음을 상징하고 있다.”3)‘재한 중국반 공의사를 돕는 중화민국 각계 위원회’가 준비한‘귀국 반공의사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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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표어’가 외교부에서‘의사의 귀국을 위해 담화를 발표’해 주기를 총통에게 신청한 문건 속에 수록되어 있는데, 아래의 표어들은 당시 의 분위기와 시국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공의사의 귀국 환영은 대륙동포의 귀환을 맞이하는 것이다! 반공의사의 귀국 환영은 반공항소의 승리를 맞이하는 것이다! 반공의사의 귀국은 중화민족의 정기의 표출이다! 반공의사의 귀국은 폭력에 대한 정의의 승리의 확증이다! 반공의사의 귀국은 공산폭정의 붕괴의 시작이다!4) 위의 언론매체의 보도가‘반공의사’및 그것으로 대표되는 한국전 쟁을 국민정부의 반공 승리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음은 분명하다. 1950년대의 대만에서 한국전쟁의‘반공의사’를 중심으로 한 반공 승리의 상징은 지속적으로 정부와 민간 각 부문에서 선전과 복제, 가공을 거쳤다. 1955년‘123자유일5)’의 일주년은 일강산(一江山)전투 6) 에서 국군이 전멸당했던 바로 그 즈음이었다. 따라서‘123자유일’ 및 이로써 대표되는 반공/한국전쟁 승리는 국민정부에 의해 대대적 으로 선전되었다. 이후 수년 동안 국민정부는‘123자유일’을 기념함 으로써 반공/한국전쟁 승리를 선전하는 국민정부의 선전효과와 사 회동원은 더욱 증가하였으며, 특히 일강산에 대한 기념과 대비되는 가운데‘123자유일’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음은 확실하다. 이후 매년 (1월 23일)‘123자유일’전후에 대만 각지에서는 떠들썩한 군중동원활 동과 매체의 보도를 볼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특별한 것으로는, 자유 일 일주년의 반공의사‘가장(假裝)가두시위’와‘자유운동으로 통하는 곳곳의 도로’(≪중앙일보≫, 1955년 1월 23일), 자유일 2주년의‘자유일 야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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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앙일보≫, 1956년 1월 24 일), 자유일 3주년의‘자유 의 종소리 23발’(≪중앙일보 ≫, 1957년 1월 23일), 자유일 4 주년의‘전국 각계의 성대 한 모임과 축원, 쇠창살 속 인민의 자유 쟁취를 성원, 대북에서 만 명의 가두시 위’(≪중앙일보≫, 1958년 1월 23 일)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보도는 모두‘반공’승리 및 전국 각계인민의 국민 정부에 대한 지지를 반복 적으로 확인하고 있다. 자유일 6주년은 국민정부가 중국 내전에서 패하여 대만으로 퇴각 한 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중화민국의 천청(陳誠)부총통은“대륙 광 복의 객관적 조건이 이미 무르익었다. 국민은 자신의 힘을 힘껏 충 실히 하여 공산당의 붕괴를 재촉하자”(≪중앙일보≫, 1960년 1월 24일)라고 공언하였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반공의사’를 중심으로 한 경축 기념활동과 매체의 보도는 대만에서 중화민국의‘반공’승리의 정 서와 도덕입장을 고취하고 강화하였다. 더욱 주목할 만한 점은 한국 전쟁에 대한 대만 관방의 해설과 선전보도가 같은 시기 중국의 선전 보도와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각계 인민에게 정부를 지 지하고 정부의 행동에 호응해줄 것을 강조한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 대만 우체국이 1955년 발행한 '반공의사' 기념 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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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래에서는 중국의 ≪인민일보≫ 등의 매체가 한국전쟁에 대해 보도한 내용을 분석하기로 한다.

인민의 혁명 : 항미원조와 중국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중국의 ≪인민일보≫ 등 관영매체는 북한의 전쟁행위 및 대미(對美)항전에 대한 각계 인민의 호응과 지지 를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중국이 아직 참전하기 전, ≪인민일보≫ 는‘노동모범’을 보도하면서“우리에게는 침략자의 도발을 물리칠 자신감과 힘이 있다”고 밝힘과 동시에, “중국인민과 조선인은 단결 하여 미군을 대만과 조선의 대지와 영해에서 몰아내자!”7)고 부르짖 었다. 이밖에 <압록강선원>에서는“미 제국주의가 이 무모한 도발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조선을 침략한 군대를 신속히 철수시키지 않 는다면, 압록강에서의 민간 운송의 안전과 수천 명의 선원 및 그 가 족의 평화로운 삶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8)라고 밝혔다. 중국이 참전한 후, 중국의 관영 매체는‘항미원조운동’에 대한 중 국 각지와 각계의 열렬한 호응과 지지를 더욱 활발히 보도하였다. 이를테면, 1950년 11월 5일 ≪인민일보≫의 제1면에 톱뉴스로서 평 소보다 큰 활자체로 <각 민주당파의 연합 선언 - 전국 인민의 정의 로운 요구를 적극 옹호하며, 지원의 기초 위에서 항미원조와 국가보 위의 신성한 임무를 위해 분투하는 전국 인민을 옹호한다>9)를 실었 다. 11월 7일에는 청화대학교, 북경철도학원 등의 학교 교직원들이 각각 발표한 <연합선언>에 대한 옹호 선언을 실었다.10)중국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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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펑(趙鵬)이 특별히 지적한 바에 따르면, ≪인민일보≫에 이 선언 이 실렸을 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든 서명자의 이름이 게재되 었다는 점이다. 인명의 글자수는 비교적 고정된 편이고 이름 사이에 는 공백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대단히 가지런하게 배열된 수많은 이 름은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며 주목을 끌었다.”11)이러한 연 명의 방식은 신문지상에 또다시 나타났다. 자오펑의 지적에 따르면, 가장 특색 있는 연명은 1950년 11월 6일자의 ≪문회보(文匯報)≫에 나타났는데, “이 신문의 당일 제1면은 그 반 이상이나 되는 부분이 서명의 흔적으로 가득 찼다. 손으로 쓰여진 서명은 인쇄체보다 훨씬 눈에 띄었으며 친화력을 지녔다.”12) 이러한 편집형식이‘항미원조 운동’에 대한 각계 인민의 호응과 지지가 한결같다는 인상을 보여 주는 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같은 시기에 중국의 관영 신문은 훨씬 밀도 높게‘독자의 편지’를 실었다. ≪인민일보≫는 1950년 11월 2일에 독자의 글 7 편을 실었 다. 보도된 표제는 <미제의 침략 확대를 좌시해서는 안 된다!>이었 다. 이날부터 11월 8일까지 매일 <꿋꿋한 항미원조와 국가보위 - 각 지 독자의 편지>13)라는 똑같은 난이 나타났다. 독자의 편지 투고는 다른 매체에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를테면 11월 4일부터 ≪공인 일보(工人日報)≫는 <국가보위를 위해 결심하고 행동하는 각지 노 동 모범대표의 편지> 등 독자의 편지14)를 잇달아 게재하였다. ≪광 명일보≫ 역시 <항미원조와 국가보위를 위해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 다> 등의 글15)을 게재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전쟁 보도는‘항미원조 운동’에 대해 각계 인민이 일치단결하여 지지한다는 인상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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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 만한 점은, 위에서 서술한 연명 방식의 <연합선언>처럼 중 국 관영 신문의 일부 보도가 특별히 구체적인 숫자를 강조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인민일보≫는 1950년 12월 8일 각계 인민이 전선의 병 사에게 써 보낸 위문편지에 대해 보도하였다. 그 보도 내용 중에는 “위문편지는 전국의 각 대·중·소 도시와 광대한 농촌에서 보내왔 다”, “편지를 써 보낸 사람은 부대 지휘관, 노동자, 농민, 기관 간부, 초·중·고 학교와 대학교의 교수, 교직원, 학생, 과학공작자, 문예 공작자, 의료계 종사자 및 기타 각 계층의 인민을 포함하고 있다”는 등을 강조하는 것이 있으며, 그 밖에 특히“본보의 편집부에 조선의 전선에 전해 달라고 보내온 위문편지는 매일 수백 통에 달하고 서명 자의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른다”16)고 언급한 것도 있다. 12월 18일의 보도는 위문전보를 보내온 29곳 단위의 명단을 열거하였다.17)이즈 음의 ≪공인일보≫ 보도는 13 지구의 위문 상황을 열거하였다.18) 관 련 보도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50년 12월 3일자 ≪광명 일보≫의 <중국과 조선의 병사를 열렬히 위문하는 북경시 각계>라 는 보도인데, 이 글에서는“시의 학생연합은 대학의 위문편지 3,243 통, 위문품 자루 3,186개, 인민폐 21,125,950원, 생활용품 979건, 금시계 케이스 하나, 금반지 33개, 백금반지 2개”19) 등등으로 상세 히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관영신문 보도가 특히 방대 한 숫자로써‘항미원조운동’에 대한 각계 인민의 지지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보도에서‘항미원조운동’에 대한 각 계 인민의 지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은, 중국 관영신문이 만들 어낸‘항미원조운동’이 단지 대외적으로 조선을 지원하고 미국에 맞 서 싸우는 전쟁일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는 인민이 일치단결해 수 행해야 할 공산혁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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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해협 양안의 정치동원 속의‘한국전쟁’

: ‘한국전쟁’으로써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조작하고 상대를 폄하하는 전략 역사 기억에 관한 연구를 통해 학자들은, 기억을 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정부 혹은 매체가 운용했던 서로 다른 논술전략을 늘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역사 기억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주 발견되는 두 가지 현상(혹은 전략)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조작하는(self-glorifying)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폄하하는 (other-maligning)것이다.20)우리 역시 대만해협 양안의 한국전쟁 관련 보도 선전 속에서 양측 정부가 어떻게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이 두 가 지 전략을 운용하여 대중에 대한 정치동원을 진행하였는지 똑똑히 살펴볼 수 있다. 대만 국민당 정부의 경우, ≪중앙일보≫의 보도는 풍부한 감성적 문장으로써 이들‘반공의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대한가를 역설 한다. 그들을‘죽음의 신에게 버림받은 자’라 일컬음과 동시에, 이 들‘반공의사’의 행동을‘죽음의 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로 정당화한다. 이를테면“어두운 밤 공산도배를 죽이고 자유를 찾아 달아나다”, “의사, 죽음을 무릅쓰고‘천등에 불을 밝히려’하다”(1953 년 9월 1일), “장렬한 단식 행위”(1953년 9월 4일), “반공의사 평화촌에 들어 가 공산도배에게 투석시위 하다 - 세뇌원의 헛수고, 반공포로는 결 코 속지 않는다”(1953년 9월 18일)등의 예가 그것이다. 다른 한편, ≪중 앙일보≫의 보도는 국민당 정부의 적수인 중국공산당 세력을 끊임 없이 폄하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빌어 자신의 정권의 도덕적 우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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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정전협정이 조인되었을 무렵, “정전 협상 타결소식이 전해지자 공산도배는 최후의 발악을 하듯이 맹렬 한 공세를 퍼붓다”(1953년 7월 27일), “공산도배는 연합군의 비행기를 가 장 두려워한다”(1953년 9월 1일), 인민지원군 포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산도배가 위장통역관을 훈련시켜 포로감시위원회에 잠입을 시 도하다”(1953년 9월 5일), “공산도배가 정전협정 조항을 위반하여, 반공 의사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전쟁포로 명단을 몰래 베껴 가족에게 보 복을 시도하다”(1953년 9월 14일), 심지어 연합군조차“반공포로를 위협 하는 공산도배를 질책하다”(1953년 9월 17일), 나아가“공산도배가 북한 에서 음모를 획책하다”(1953년 9월 14일)고 고발하기도 하였다. 공산세력을 폄하(other-maligning)하는 전략은 1953년 10월 절정에 달하였다. 한국 경내에서 인도군대가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전쟁포 로수용소에서 10월 1일 반공포로와 위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전쟁 포로 가운데 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대만에서 훨 씬 강도 높고 감정을 부추기는 신문보도와 사회(정치)동원을 불러 일 으켰다. ≪중앙일보≫는 잇달아 글과 사진을 실어 보도하였는데, “전국 인민의 격앙과 비분, 인도군의 학살과 폭행을 규탄한다”(1953년 10월 4일), “각계는 연합국에 전보를 띄워, 인도군의 폭행에 항의하고 인도의 중립 자격을 박탈할 것을 요구하며, 폭행의 재발 방지와 흉 악범의 엄한 처벌을 요구한다”(1953년 10월 5일), “각 인민단체는 잔혹한 인도군을 엄히 처벌할 것을 한 목소리로 호소한다”(1953년 10월 6일), “인 도군의 의사 학살에 항의한다”(1953년 10월 7일)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 대북시에서는 10만 명을 동원한 집회를 열어“인도군의 반공의사 학 살에 항의”(1953년 10월 8일)하였으며, 대중(臺中)시는 10월 8일에 3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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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중에는 5만 명이 가두시위를 벌여“한 목소리로 분노하고 의 사를 위로하였으며,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다고 신문은 보도하 고 있다. 또한 병동(屛東)에서는 폭행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가두행진 을 벌여“천만 명이 분노”(1953년 10월 9일)하였으며, 각지에서 대규모 시 위를 벌여“한국 경내에서 일어난 인도군의 포로 학살행위에 항의” (1953년 10월 10일)하였다. 하지만 비난의 대상은 급속히 인도에서 중국 공산당으로 바뀌었다. ≪중앙일보≫의 보도는 특히 이 사건을 계기 로 공산세력을 폄하하였는데, 10월 9일자 ≪지도주간(地圖週刊)≫의 보도 내용을 대표로 들 수 있다. 즉“전국은 분개하여 한 목소리로 항의한다. …… 인도군은 공산도배에 아첨하여 반공의사를 학살하 였다”느니, “공산도배는 포로감시기구를 빙자하여 지원제도를 파괴 하였으며, 포로파송회는 소련 공산도배의 조종을 받아 터무니없이 공산도배의 편을 들고 있다”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 듯이, 한국전쟁 및‘반공의사’와 관련된 보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종의‘반공’이라는 집단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끝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조작해 내고 (self-glorifying) 상대방을 폄하하는(other-maligning) 이 두 가지 전략의 결합이다. 1953년 10월 10일 국경일 기념대회에서 발표된 <전국 동 포에게 고함>이란 글은 그 대표적인 일례이다. 14,000여 명의 재한(在韓)반공의사는 굳건한 뜻을 나타냈는 바, 그들은 중화 민족의 기상과 보국충정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공산도배의 가 짜 정권이 이미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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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가 이 글 앞에 덧붙인 표제는 커다란 활자체로 다음 과 같이 적었다. “주덕(朱德), 마오쩌둥(毛澤東)악당은 떨고 있다. 국경 기념대회는 동포에게 고하나니, 굳건한 믿음으로 악당을 물리치고 대륙을 수복하자.”22) 이상의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1950년부터 대만의 국민정부는 역사 기억과정에서 흔히 보이는 두 가지 전략 - 자신의 영광과 위대 함을 조작하기와 상대방을 폄하하기 - 을 구사하였는데, 바로 한국 전쟁을 통해 대만의‘반공’과‘(대륙에 대한)반격’을 표방하는 한편, 이 로써 대만사회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지지와 충성을 도모하고, 아울 러 대만사회에서‘대중국(大中國)’의 정체성을 수립, 강화하여 최종적 으로 반드시 공산도배를 물리치리라는 희망을 적극적으로 조작해 내고 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담론전략이 중국 관영 신문의‘항미원 조운동’에 대한 수많은 보도에도 나타나 있다. 한편으로 이들 보도 는 적극적으로 지원군의 영웅형상을 조작해 냈다. ≪인민일보≫의 제1면을 예로 들면, 1950년 12월에“용감무쌍한 여송산(獨膽英雄呂松 山)”‘혼자서 미군의 참호를 봉쇄하여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은 상황 속에서 30여 명의 미군병사( 를 포로로 붙잡다’)23) 및“양근사(楊根思)”‘조국을 위하여, 조선인민을 구하기 위해 10근( 짜리 폭약을 움켜들고 도화선을 끌고서 적진으로 뛰어들다’)24)등 용사들의 전투 업적 을 게재하였다. 이듬해 3월에는“곽충전 소대(郭忠田排)”의 전사들과 관련된 보도‘닷새간 밤낮으로 눈을 붙이지 못하다’( , ‘하룻밤 열두 시간의 구보 전진’, ‘최소 의 소모로 자신보다 수천 수백 배의 적의 소모를 이끌어내다’)25)도 보인다. 이들 보도 는 모두 전선 병사들의 희생적인 봉사와 특출한 모습에 중점을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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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같은 시기에 특히 적과 적을 압도하는 지원군 병사의 모습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강조한 보도도 보인다. 이를테면 ≪인민일보≫ 1951년 3월의 제1판에 실린 상세한 보도를 살펴보자. 1월 18일 오후 3시, 미국침략군 제3사단 특수병 중대 150여 명이 차량 9대 와 탱크 3대에 분승하여 금량장(金良場)내의 중국인민지원군 모 부대 제1대 대 제3중대 진지를 급습하였다. 지원군은 적들이 화력권 안으로 들어서기를 기다린 후에 기관총으로 차량 위의 적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으며, 앞 다퉈 차량에 기어올라 도망하려던 적들은 줄지어 사살당하였다. 차량에 기어올 라 통신기로 후방에 연락하고 있던 적은 지원군에게 사살당하여 송신기 위 에 거꾸러졌다.26) 중국 관영 신문이 한국전쟁에 대한 이들 보도를 통해 지원군의 영 웅형상을 만들어내려 했음은 분명하다. 주목할 만 한 점은, 같은 시 기 한국전쟁과 관련된 보도 가운데에 중국 관영 신문이 훨씬 많은 지면과 보다 상세한 서술을 통해 상대방을 폄하(other-maligning)하였 다는 것이다. 일찍이 1950년 11월 26일 ≪인민일보≫는‘미군의 조 선인민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이란 제목의 보도를 게재하였 다. 이 보도는 미군이 한국에서 저지른 행위를 대단히 상세하게 다 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8월 3일 패주하던 미군은 현지의 농민들에게 그들을 따라 남쪽으로 철수할 것을 강요하였다. 난민들은 황간(黃澗)부근의 철교 아래로 도망가 숨었다가 미군에게 포위되어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현장에서 200여 명이 사 망하고 50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백 명이 넘는 어머니가 십여 명의 젖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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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를 남겨둔 채 숨졌다.27) 이 보도는“도살은 1949년부터 시작되었다”, “1945년부터 1949 년 7월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미제국주의자의 직접 참여와 지휘 아래 미제와 이승만 도배는 작당하여 남조선 인민 47만 8천 명을 체포하였으며, 14만 9천 명을 학살하였다”는 보충설명을 곁들 였다. 나아가 한국의 수도를‘대 도살장’으로 비유하였으며, “미국 침략자의 짐승 같은 군대가 조선전쟁 중에 저지른 살인과 방화, 강 간과 약탈의 천인공노할 죄상은 실로 나치가 유럽에서, 일본 침략자 가 중국에서 저지른 야만적 행위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28)고 덧붙였다. 사흘 뒤 ≪인민일보≫는 평양에서 귀국한 조선 화교를 보도하면 서“미제와 이승만 도배가 작당하여 조선의 화교를 학살한 죄행”을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미제와 이승만 도배가 남조선을 통치할 때 화교는 일본제국주의 통치기보다 훨씬 참혹한 박해를 당했다.” 29) 자오펑이 지적하였듯이, 이러한 보도의 기능은“중국민중과 조 선 화교의 친근감을 이용하여 적의 죄악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또한 참전에 정의성을 더욱 부여하기 위함”30)이었다. 적의 죄행에 대한 이들 보도를 통하여 우리측(중국)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함과 동 시에, 우리측의 참전의 정당성을 조작해 냈다. 이를 근거로 하여, ≪ 인민일보≫는 1950년 12월 11일자의 제1면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 였다. “이러한 군대, 이런 사람들로 조직된 군대가 비록 비행기와 탱크, 대포, 자동차, 카빈총을 갖추었다 해도 이처럼 불분명한 전쟁 에 종사한다면 어찌 패전하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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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적)의 악행과 죄상에 대한 서술 외에, 상대방을 폄하하는 보 도에는 실패한 미군의 참상도 자주 보인다. ≪인민일보≫는 미군이 얼마나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으며 얼마나 자발적으로 투항하는지 를 보도하였다. 어느 포로에 따르면, 미군 병사는 늘 자신의 체온을 유지할 방법만 궁리하고 병이 든 양 위장하여 전투에 나가지 않았으 며, 심지어 어떤 자는“귀국할 목적으로 카빈총으로 자신의 발목을 끊기도 하였으며”, “다행히 지원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말하는 미군 포로도 있다.32)이밖에도 중국어를 하는 미군이 많이 있는데‘투항’ 이란 말밖에 하지 못하며, 지원군이 전쟁터에서 적을 향해 뿌리는 ‘투항안전증’이 미군 병사들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고 보도하였 다.33)상대방을 폄하하는 보도에는 적에 대한 희화화도 포함되어 있 철의 삼각지대 전투에서 싸우고 있는 중국 인민지원군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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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장 대표적인 일례는 1951년 2월 ≪인민일보≫에 실린 남한군 의 미국 고문에 관한 보도인데, 그는 포로로 붙잡혔을 때 쉴 새 없이 떨더니 문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기어와“연합국은 일찌감치 중국의 참전을 허용했어야 마땅하다”34)고 말했다고 한다. 이 보도 는 모든 미군 병사의 가슴 앞에‘똥개 패(狗牌)’라고 일컬어지는, 개 인의 신분을 담은 동패(銅牌)가 매달려 있음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똥개’라는 말은 미국육군사관학교 군관을 지낸 적이 있는 이 미군 소령이 직접 말한 것이다.”35) 그러나 중국 관영신문의 상대방 폄하 전략은 전쟁터에서의 적과 관련된 보도에만 그치지 않고, 적(미국)이 역사상 중국에게 저지른 모 든 악행에도 연결된다. 가장 대표적인 일례는 1950년 11월 5일 ≪인 민일보≫에 실린 <우리는 반드시 왕은제를 위해 복수한다 - 북경철 도노동자의 미제에 대한 증오>라는 글이다. 이 글은 1946년 9월 철 도노동자 왕은제(王恩弟)가 미군의 총에 살해당한 사건에서 출발하여,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주구의 통치아래에서의 비인간적 삶’을 서술 하고, 나아가“현재 왕은제를 살해한 미국의 야수가 우리나라의 변 경으로 전진하고 있다. 좌시해서야 되겠는가? 절대로 그럴 순 없다! 쳐부수자! 노동자여, 분노의 주먹을 높이 치켜들자”36)고 주장한다. 그후 11월 11일에 실린 글에서는 아편전쟁 당시 미국이 상해를 침략 한 죄상을 열거하고 있다.37)자오펑의 연구에서 지적하였듯이, “미 국과 관련된 죄행이 표면적으로는 영국 및 일본만큼 극악하지 않기 때문에, 글은 미국의 침략 본질을 파헤치는 데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따라서 이 글에서는 미국이“상해를 침략하였을 때 무력을 사용하여 조계를 개설하지도 않았고 영사관이 정치세력을 대표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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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지도 않았지만, …… 그 실제를 따져보면 중국인민, 상해인민에 대한 미국의 침략은 영국제국주의와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38) 라고 특별히 강조하였다. ‘미국의 침략 본질을 파헤치는’똑같은 보 도는 11월 28일에도 실렸는데, 독자와의 문답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였다. 독자의 질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미국은 중국에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열었으며 각종 자선사업을 행했는데, 이는‘좋은 일’ 이 아닌가?”이 물음에 대해 ≪인민일보≫의 편집부는 이렇게 답변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좋은 일’의 목적이‘정신상의 영향력을 확 장하고’, ‘미제에 대한 원한을 약화시키고 숭미(崇美), 친미(親美), 공미 (恐美)등의 매판사상과 민족 자비감(自卑感)을 배양함으로써 경제적 착 취와 정치적 간섭, 특무활동과 군사침략을 확대하기에 편하게 만들 기 위함’39)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보다 특별한 점은 미군(적)의 죄상 및‘침략 본질 파헤치기’를 서술 하는 것 외에도, 중국 관영 신문이 상대방을 폄하하는 보도 중에는 현재 중국의 적(미국)을 중국의 지난날의 적(일본)과 연결시키는 논술방 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0년 10월 17일의 ≪인민 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미국은 유엔헌장을 위반하면서 일본을 이용하여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 부는 확실하고도 광범한 조사 자료를 지니고 있으며, 미국이 조선 인민에 반(反)하는 전쟁에서 일본 군인을 사용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 다.”40)≪광명일보≫ 역시 1950년 10월 25일 제1면에“미제는 일본 인을 이용하여 작전을 펼치는데, 이는 우리가 묵과할 수 없는 일이 다”41)라는 민주인사 장내기(章乃器)의 지적을 보도하였다. 이후 ≪인 민일보≫가 발표한 <일본 침략자를 따라 중국을 침략한 미제의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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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미국의 오늘날의 행위를 과거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동 등하다고 명확히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본 침략자 는 중국을 침략하면서 먼저 조선을 침략한 적이 있으며”나아가 대 만을 점령하였는데, 현재 미국 역시“일부러 조선을 침략하는 전쟁 을 도발하고”“조선의 형세를 빌미로 공공연히 대만을 무장 점령하 였다.”42)이상의 예들은 중국의 관영 신문이 어떠한 전략을 통하여 한국전쟁과 관련된 보도에서 상대방/적(미국)을 폄하함과 동시에 중 국의 참전의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웠는지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대만의 ≪중앙일보≫와 마찬가지로, 중국 관영 신문의 보도에서 도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조작하기와 상대방을 폄하하기라는 두 가지 전략의 결합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민일보≫는 먼저 1951년 2월 14일 <중국과 북조선 부대 강력한 반격을 일으키다>라 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현재 아군은 대단한 기세로 파 도가 휘몰아치듯 남진하고 있다. 적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현 재 아군이 반격을 개시한 후, 적군은 이미 전선 전역에서 붕괴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43) 그러나 며칠 후인 2월 17일의 보도에서는 아군이 얼마나 유능한가를 이렇게 강조하였다. “소수의 병력으로 굳세게 저항하여 적군을 막아냄으로서 이 방면의 적군은 막대한 사 상자를 내고 있으나, 전진은 대단히 완만하여 매일의 전진 거리는 평균 1.5킬로미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18일간의 완강한 격전 속 에서 중국과 북조선 인민군은 만 명에 달하는 적군을 살상하였다.” 44) 중국의 관영신문이 제기하고자 하는 결론은 곧 아군의 진용이 장 대할 때에는 적군이 궤멸되고, 아군이 적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일 때 에는 소수로써 다수를 대적할 수 있으니 역시 적군이 궤멸된다는 것 이다. 보다 흥미 있는 또 다른 일례는 지원군이 1951년 3월 14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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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수도인 서울에서 철수한 일과 관련된 보도이다. 이 전투는 명확 히 미군의 승리였지만, ≪인민일보≫는 지원군이 결코 실패하지 않 았다고 해석하였다. “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주동적으로 서울에서 철수한 후에야 미군이 서울을 재점령할 수 있었다”45)는 이유를 들었던 것이다. 이후 더욱 상대방을 폄하하여“미국 침략자 는 중국과 북조선 인민군이 주동적으로 일시 서울을 철수한 것에 대 해 몹시 당혹스러워 하고 있어, 서울을 되찾았다 하여 떨어진 자신 감이 회복되리라 보이지는 않는다”고 평했다. 또한 연합뉴스 기자 의 견해를 인용하여“미군 지휘관들은 중국과 북조선 인민군의‘신 비스러운 철수의 수수께끼’에 대해 현재 해답을 찾고 있다”고 밝혔 다. 심지어 미군 수뇌인 맥아더 역시 낙관하지 못한 채, “불안한 기 색을 감추지 못하고서‘서울의 함락은 군사 관점에서 볼 때 전투 중 에 일어날 수 있는 우연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46)고 전 하기도 했다.

결론

1950년대의 대만 매체에 나타난 한국전쟁은 특히‘반공의사’로 대표되는데, 이는 사실 국민정부의 정치동원 속에서 절박한 필요에 의해 반공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한국전쟁과 관련된 각종 언론매체 의 보도와 경축기념활동을 통하여, 중화민국 정부는 대만에서 자신 의‘반공’승리의 정서와 도덕적 입장을 조작하고 강화했다. 아울러 동일한 시기에 중국 당국 역시 한국전쟁에 대한 보도를 이용하여 ‘인민의 혁명’을 주축으로 하는 정치동원을 진행하였다. 양측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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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해 보면, 대만과 중국의 한국전쟁 관련 보도는 유사한 점이 많은 데, 특히 정부에 대한 각계 인민의 지지와 호응을 강조하고, 아울러 이를 통해 자신의 영광과 위대함을 조작하고 상대방을 폄하하는 등 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들 목표는 사실 모두 각자의 당시의 정치 적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 기억’을 연구하는 저명 한 학자인 칸슈타이너(Wurf Kansteiner)의 지적에 따르면, 전쟁에 대한 한 사회의 기념과 기억의 수립은 흔히 전쟁의 역사적 진상을 이해하 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면한 사회정치적 필요를 위해서이다.47) 이 글은 대만과 중국의 정치동원 속의 한국전쟁과 관련된 보도를 분석 함으로써, 한국전쟁에 대한 양측의 보도가 바로 당시 정치사회적 현 실의 필요에 따른 주관적인 재현임을 보다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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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사항 1)≪중앙일보≫는 원래 중국국민당 기관지로서 1928년에 상해에서 창간되어 1949년에 국민당을 따라 대북(臺北)으로 옮겨왔다가 2006년에 잠시 휴간되었다. 다음의 소개는 이 신문이 국민당 정부 및 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한 이후의 대만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는가 를 잘 보여준다. “중국국민당은 중화민국을 수립한 정당이며, ≪중앙일보≫는 국민당이 창간한 매체이다. 이 신문은 민국 17년(1928년) 2월 1일 상해에서 창간된 후, 총 28,356호를 발행하였다. 이러한 특수한 관계로 말미암아 ≪중앙일보≫는 여타의 언론매체와 달리 국가발전 및 민족운명 과 부침을 함께 겪은 신문이었다. 장경국(蔣經國)은 일찍이‘≪중앙일보≫는 영광스러운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국가의 앞길은 ≪중앙일보≫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이 신문은 각별히 중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중앙일보≫ 인터넷판 http://www.cdnews. com.tw/cdnews_site/docDetail.jsp?coluid=368&docid=100182607, 2013년 2월 2일 검색 2)관련자료로는 주수환(周琇環) 편, ≪전후 외교사 자료총집: 한국전쟁과 반공의사 편(1)(戰後外交史 料彙編:韓戰與反共義士篇(一)≫과 ≪전후 외교사 자료총집:한국전쟁과 반공의사 편(2)(戰後外交 史料彙編:韓戰與反共義士篇(二)≫(臺北縣:國史館,2005) 및 심행의(沈幸儀), <만사천명의 증인 : 한국전쟁기‘반공의사’연구(一萬四千個證人:韓戰時期‘反共義士’之硏究>, 國立師範大學歷史系 碩士論文 (台北市,台灣: 2008) 등을 참조하시오. 3)주한대사관 전문, 1954년 1월 20일. 주수환(周琇環) 편, ≪전후 외교사 자료총집:한국전쟁과 반공 의사 편(2)(戰後外交史料彙編:韓戰與反共義士篇(二)≫(臺北縣:國史館,2005) 287쪽 4주한대사관 전문, 1954년 1월 21일. 주수환(周琇環) 편, ≪전후 외교사 자료총집:한국전쟁과 반공의 사 편(2)(戰後外交史料彙編:韓戰與反共義士篇(二)≫(臺北縣:國史館,2005) 289-290, 303-304쪽 5‘123자유일(自由日)’은 한국전쟁에서 사로잡힌 중국군 포로들이 1954년 1월 23일 대만으로 귀환 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1993년에 세계자유일(世界自由日)로 개칭되었다. - 역주 6)일강산(一江山) 전투는 1955년 1월 18일 중국인민해방군과 중화민국 국군이 절강성 일강산도(一 江山島)에서 벌인 전투를 가리킨다. 전투는 이틀 동안 치러졌는데, 1월 19일 2시에 인민해방군이 이 섬을 점령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지휘관이 사망하고 부지휘관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500여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포로가 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 역주 7)≪인민일보≫ 1950년 8월 29일 제1판. 자오펑(趙鵬), <항미원조운동 초기의 ≪인민일보≫ 선전방 식 분석>, ≪중공당사연구≫, 2010년 제7기에서 재인용. 인터넷판은 http://www.zgdsw.org.cn/ GB/218997/219022/14818467.html(2013년 3월 19일 기준) 이하 자오펑, <항미원조>로 약칭. 8)≪인민일보≫ 1950년 9월 7일 제4판, 자오펑, 앞의 책 9)자오펑, 앞의 책 10)≪인민일보≫ 1950년 11월 7일 제3판, 자오펑, 앞의 책 11)자오펑, 앞의 책 12)≪문회보≫ 1950년 11월 6일 제1판, 자오펑, 앞의 책 13)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14)≪공인일보≫ 1950년 11월 4일 제1판, 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15)≪광명일보≫ 1950년 11월 3일 제3판, 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16)≪인민일보≫ 1950년 12월 8일 제2판, 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17)≪인민일보≫ 1950년 12월 18일 제2판, 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18)≪공인일보≫ 1950년 12월 14일 제1판, 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25)

19)≪광명일보≫ 1950년 12월 3일 제2판, 자오펑, 앞의 책에서 재인용

20)Yinan He, “Remembering and Forgetting the War: Elite Mythmaking, Mass Reaction and Sino-Japanese Relations, 1950- 2006”, History and Memory, Vol.19, No.2 (November 2007), pp.43-74. 21)≪중앙일보≫ 1953년 10월 10일 22)앞과 같음 23)≪인민일보≫ 1950년 12월 13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24)≪인민일보≫ 1950년 12월 25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25)≪인민일보≫ 1951년 3월 5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26)≪인민일보≫ 1951년 3월 15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27)≪인민일보≫ 1950년 11월 26일 제4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28)앞과 같음 29)≪인민일보≫ 1951년 11월 29일 제3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0)자오평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1)≪인민일보≫ 1950년 12월 11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2)≪인민일보≫ 1951년 3월 29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3)≪인민일보≫ 1951년 5월 19일 제4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4)≪인민일보≫ 1951년 2월 26일 제3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5)앞과 같음 36)≪인민일보≫ 1950년 11월 5일 제6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7)≪인민일보≫ 1950년 11월 11일 제2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38)앞과 같음 39)≪인민일보≫ 1950년 11월 28일 제3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0)≪인민일보≫ 1950년 10월 17일 제4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1)≪광명일보≫ 1950년 10월 25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2)≪인민일보≫ 1950년 11월 3일 제5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3)≪인민일보≫ 1951년 2월 14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4)≪인민일보≫ 1951년 2월 17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5)≪인민일보≫ 1951년 3월 17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6)≪인민일보≫ 1951년 3월 18일 제1판, 자오펑의 ≪항미원조≫에서 재인용

47)Wurf Kansteiner, “Finding Meaning in Memory: A Methodological Critique of Collective Memory Studies”, HistoryandTheory,41(May2002),pp.188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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