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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儀정권의 문화정책과 중국에서 온 좌익 작가들

2. 전후시기 문화계의 魯迅熱

2.1 陳儀정권의 문화정책과 중국에서 온 좌익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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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陳儀정권의 문화정책과 중국에서 온 좌익 작가들

반세기에 걸쳐 서로 격리되어 있던 중국과 대만은 문화〮사고방식에서의 차이 는 물론이고 민족 간의 위화감도 불가피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민당 은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을 접수한 뒤 대만에 잔존하고 있는 소위 ‘해로운 일본 문화와 사상’을 제거하는 데 힘을 집중했다. 대만 행정장관을 맡은 천이(陳儀)는 우선 언어의 일원화를 급선무로 여겼으며 일련의 중국화 문화정책을 실시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대만에서는 여러 민간잡지와 간행물이 연이어 출간되었다. 이 를테면 중국에서 활동하던 대만 지식인에 의해 발행된 『 전봉(前鋒) 』 (1945)과

『신대만(新台灣)』(1946), 중국 출신과 대만 출신인 좌익 지식인들이 함께 만든

『문화교류(文化交流)』(1947), 그리고 지식인들의 종합적인 교류 무대인『대만 문화(台灣文化)』(1946)등이 있다.

이 가운데 루쉰 수용 열풍을 주도한 잡지로는『대만문화』를 들 수 있다. 1946 년 대만문화협진회가 발행한『대만문화』는 문화, 문학, 교육, 그리고 정치, 사회 등 전반을 다루는 종합적인 잡지였다. 현대화를 지향한 잡지인데 대만문화에 대 하여 편견을 가진 비판적인 글이 많았으나 대만과 조국중국 사이에 문화교류의 다리 역할을 하였다.53 루쉰의 문학은 일찍이 식민지시기부터 많이 알려졌기 때 문에 해방 이후 양안 문인들의 공통적인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쑤신(蘇新), 쉬소우상, 양윈핑 등의 노력으로 1946년 루쉰 서거 10주년에 특집이 나왔는데 루쉰을 회고하고 추종하는 중국과 대만 지식인들의 논의가 수록되어 있다.

사실 천이는 루쉰과 같은 고향 출신이자 일본 유학 시절의 동창이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문화정책을 수행하는 주력 기관인 대만편역관(台灣編譯館)의 관장 직무를 똑같은 루쉰의 친구였던 쉬서우상(許壽裳)에게 맡겼다.54 쉬서우상 (1883-1948)은 대만인의 정신적 교육을 위해 루쉰과 그 문학을 방편으로 한 중국 신문화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6년 6월에 타이베이에 왔는데, 마침 그 해

53 崔末順,「「重建台灣、建設新中國」之路:戰後初期刊物中「文化」和「交流」的意義」,『台 灣文學研究學報』21기, 2015, 39-69면 참조.

54 천이, 쉬서우상과 루쉰 세 사람은 모두 중국 저장성 사오싱시(浙江省紹興市) 출신의 동향이 자 일본 홍문학원(弘文學院)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창이었다. 쉬서우상은 일본 유학 배경도 가지는 동시에 중국문화도 섭렵한 학자로서 대만에서 문화교육을 시행하는 데 가장 적절한 사람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黃英哲,「許壽裳與戰後初期臺灣的魯迅文學介紹」,『國文天地』7 권 5기, 1991, 7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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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루쉰 서거 10주년을 맞아 첫 논설인「루쉰과 청년(魯迅和青年)」(1946.10.19) 과「루쉰의 덕행(魯迅的德行)」(1946.10.21)을『화평일보(和平日報)』에 발표하였 다. 이어서『대만문화(台灣文化)』의 ‘루쉰 서거 10주년 특집호’에「루쉰의 정신 (魯迅的精神)」(1946.11.1)을 게재했다.『대만문화』의 루쉰 서거 10주년 특집호 는 당시 대만 민중들의 사랑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전후시기 대만 사람들의 루쉰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많았음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쉬서우 상은 상술한 세 편의 비평을 통해 루쉰을 ‘청년의 멘토’라고 내세우며‚루쉰문 학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전투정신 그 자체였다. 계획적이고 끈기 있으며 대중을 위한 싸움에 이바지했다.‛55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대만 문화 건설의 방향에 대해「대만에 또다른 새로운 5.4운동이 필요하다(台灣需要一個新的五四運動)」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주지하다시피 민국 8년에 일어났던 5.4운동은 중국 수 천년 이래 봉건제도의 독소를 제거 하고 민주와 과학의 정신을 지향한 문화운동이었다. 우리 나라의 현대사에 가장 획기적이며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나는 우리 대만에도 또다른 새로운 5.4운동이 필요하다고 생 각한다. 과거에 받아온 일본의 독소를 모두 제거하고, 민주와 과학을 발전해야 한다. 또한 도덕의 실천을 추구하며 민족주의를 고취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만의 5.4운동에 부여된 가치와 임무는 그전보다 더욱 중대하고 막중하며 절박하다고도 하겠다.56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쉬서우상은 대만에서 새로운 5.4운동을 일 으키고자 했으며 일본문화란 독소를 없애려고 루쉰의 계몽적〮전투적 정신을 강 조했던 것이다. 쉬서우상이 대만에 머물던 2년 동안 총 37편의 글을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루쉰과 관련된 글이 16편이 있었고, 5번의 연설 중에 루쉰을 주제로 한 연설이 2번이었다.57 그는 또한 루쉰에 관련된 저서를 집필했는데, 『 루쉰의

55 許壽裳,「魯迅的精神」,『台灣文化』1권 2기, 台灣文化協進會, 1946. 원문:‚魯迅作品的精神,

一句話說,便是戰鬥精神,這是為大眾而戰,是有計畫的韌戰,一口咬住不放的。‛

56 許壽裳,「台灣需要一個新的五四運動」,『台灣新生報』, 1947.5.4. 원문:‚誰都知道,民國八 年的五四運動是掃除我國數千年來封建遺毒,創造一個提倡民主,發揚科學的運動,可說是我國現 代史中最重要的劃時代、開紀元的時期。…我想我們台灣也需要有一個新的五四運動,把以往所受 的日本毒素全部肅清,同時提倡民主,發揚科學,于五四時代的運動目標以外還要提倡實踐道德,

發揚民族主義。從這幾個要點看來,牠的價值和任務是要比從前那個運動更大,更艱鉅,更迫切 啊!‛

57 黃英哲,「第六章 魯迅思想與戰後重建」,『「去日本化」「再中國化」戰後台灣文化重建1945-1947』, 麥田出版社, 2007, 1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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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과 생활(魯迅的思想與生活) 』 , 『 망우루쉰인상기(亡友魯迅印象記) 』 , 그리고

『내가 아는 루쉰(我所認識的魯迅)』이 바로 그것이다.58 양윈핑이 그동안 발표 해 왔던 쉬서우상의 비평문들을 모아서『루쉰의 사상 및 생활』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루쉰의 언행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기록을 담고 있고 당시 대만에서 최 초로 출판된 루쉰에 관한 저서이자 가장 자세한 루쉰의 소개문이기도 하다.『망 우루쉰인상기』는 루쉰과 직접적 교류가 있었던 쉬서우상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 으로 쓰여진 루쉰전이었는데 루쉰과의 담화를 기록하고 있어 루쉰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쉬서우상과 같은 중국에서 온 지식인에 의해서 대만 전후시기의 루쉰 수용은 더욱 활발해졌다. 당시의 중국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으로 인해 시국이 요동 치고 있었는데, 국민당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기 전인 대만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마치 이상향처럼 이주할 만한 곳으로 보였다. 따라서 루쉰과 인연이 깊은 타이 징농을 비롯하여 리지예(李霽野), 리허린, 황룽찬(黃榮燦) 등 진보적인 좌익 지식 인들이 대만에서 둥지를 틀었다. 타이징농(1902-1990)은 1925년 베이징에서 결성 된 ‘미명사(未名社)’의 일원으로서 루쉰의 제자로도 볼 수 있다. 그는 대만에 오 기 전에 이미 1923-26년 사이에 나온 루쉰에 관한 비평들을 정리해『루쉰과 그 의 작품에 대하여(關於魯迅及其著作)』란 책을 펴낸 바 있다.

리지예(1904-1997)는 또한 루쉰의 제자이자 유명한 문학 번역가였다. 그는 루 쉰의 안내로 1925년에 쉬서우상을 알게 되었는데, 루쉰문학을 매개로 대만 문화 를 구축하고자 한 쉬서우상의 이상에 찬성하여 도움이 되고자 대만으로 왔고 쉬 서우상의 초대를 받아 편역관의 번역팀 팀장을 맡았다. 그리고 리지예의 동창인 리허린(1904-1988)도 대만에 오기 전『루쉰론(魯迅論)』이란 책을 편집해 출간했 고, 대만에 온 후에도 『대만문화』에「루쉰서간을 읽는다(讀魯迅書簡)」59와 같 은 루쉰에 대한 비평을 발표했다. 또한 황룽찬(1916-1952)은 루쉰의 ‘신흥목각운 동(新興木刻運動)’의 추종자이면서 예술가와 기자란 두 가지의 역할로 대만에서 활동했다. 그는 루쉰 서거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목각판화 작품「루쉰선생의 영정(魯迅先生的遺像)」(1946.10.19)을『화평일보』(新世紀, 68기)에, 「루쉰상(魯

58 楊雲萍 편,『魯迅的思想與生活』,台北, 台灣文化協進會, 1947; 許壽裳,『亡友魯迅印象記』, 上海, 峨嵋出版社, 1947; 王士菁 편,『我所認識的魯迅』,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1952.

59 李何林,「讀魯迅書簡」,『台灣文化』2권2기, 台灣文化協進會,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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迅像)」(1946.11.4)을『신생보(新生報)』(新地, 94기)에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그 는『대만문화』와『화평일보』에도「루쉰선생을 애도한다―중국의 첫 신사상가 (弔魯迅先生—他是中國的第一位新思想家)」와「중국 목각판화의 보모―루쉰(中國 木刻的保姆—魯迅)」이란 글을 각각 게재했다.

그(루쉰)는 위대한 민주투사다. 인간이 악한 세력을 이기는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제 국’,‘봉건’,‘침략’의 포위를 돌파하여 민주의 역량을 집결시켰다. 50년 간 적으로부터 유린과 약탈을 당한 대만은 이제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문화적 재건을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신생 문화의 수립에 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문화 사업을 위 해서는 많은 예지자, 선각자의 지지와 추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60

이처럼 황룽찬은 대만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원하고 있었다. 또한 루쉰의 반 제국〮반봉건 사상을 통해서 문화재건을 하고자 했다. ‘조국의 품’으로 회귀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지식인들의 인식 속에 대만과 중국은 하나로 간 주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이루지 못한 이념과 포부들을 대만이라는 ‘초 생의 땅’에서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로써 쉬서우상을 비롯한 중국에서 온 여 러 지식인들은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대만의 문화재건을 위해 5.4신문학 및 신 문화운동을 대만에 알리고 보급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