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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된 식민통치에 맞서는 불굴의 문학적 실천

1. 식민지시기 조선문단의 루쉰 수용

1.2 강화된 식민통치에 맞서는 불굴의 문학적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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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중국어문학과를 다니던 김태준(1905-1950, 호 天台山人)은 베이 징 방문을 통해 중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급변 속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영향 력과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930년대 중국 현대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일조하면서『동아일보』에「문학혁명 후의 중국문예관」29이라는 글을 발표 했는데, 「 아Q정전 」 을 중심으로 루쉰의 창작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죽어버린 아큐시대(死去了的阿Q時代)’라고 주장한 좌익 비평가 첸싱춘의 관점 과 마르크스주의 계급사관에 영향을 받아 루쉰문학을 ‘현대적 의의가 없다’고 단언하며 프로문예의 입장에서 중국 작가로 소개하려 했다.30

이로써 홍석표가 밝혔듯이 1930년대 한국에서 아나키즘 경향을 가졌던 지식인 들은 ‘자기인식’과 ‘시대적 고민’이라는 측면에서 루쉰문학의 역사적 의의와 현 실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루쉰의 좌익문학 전향에 대해 보류적인 태도 를 취하였다.31 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 무산계급문학에 기울었던 지식인들은 루 쉰문학이 프로문학 시대에 더 이상 현실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이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쉰문학의 계몽주의적 저항정신은 식민지시기의 한국 사회 에서 전반적으로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2 강화된 식민통치에 맞서는 불굴의 문학적 실천

한국은 일본 식민지시기에 들어와서 외래문화의 수용 경로가 축소되면서 모든 분야의 외국문화는 일본어를 매개로 접촉하게 되었다. 문학영역에 있어서도 역 시 일본어를 통해 세계명작 및 사상을 습득하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 시기 외 국문학의 한국어 번역은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重譯)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를테면 양백화의「아Q정전」번역에서 일본학자 이노우에 코바이(井上紅梅)의 최 초 일본어 번역문을 참조했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즉, 한국 지식인은 일본학 자들의 시각으로 제3자의 해석과 더불어 중국을 포함한 외국문학을 접하게 되었 던 것이다. 그리하여 잘못 이해하거나 선입견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 중국어에 능통한 번역자와 연구자가 등장하고 원본 텍

29天台山人, 「 文學革命後의 中國文藝觀十四: 創作界의 一瞥,主로 小說 」 , 『 동아일보 』 , 1930.12.4.

30 홍석표,「김태준의 좌익 문학비평의 주체적 수용」, 앞의 책, 160-165면.

31 홍석표, 앞의 책, 1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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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에 의거해 원문대로 충실하게 번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30년을 전후해 한국에서 루쉰과 그의 문학이 활발하게 논의되기는 했으나 1935년 카프가 해산 되고 루쉰 작품도 금서 목록에 오르는 등 정치적〮사상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루 쉰에 대한 연구열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특히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 킨 후 한국인의 전쟁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황민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한국문단과 중국문단의 접촉과 교류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다 1945년 해방 이후에야 루쉰문학의 온전한 번역소개가 다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시인 김광균(金光均)은「노신」이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는데,‚노신이여/ 이 런 밤이면 그대가 생각난다/ 온 세계가 눈물에 젖어 있는 밤/…/ 여기 하나의 굳 세게 살아온 인생이 있다. ‛ 라고 하여 식민지 지식인의 심정을 루쉰을 통하여 그려내었다.32 이와 달리 이광수는 ‘아큐’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작가였다. 일본 제국주의세력이 내세운 ‘황민’사상으로 인해 이광수는 전쟁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루쉰을 바라보았다. 그는「전쟁기의 작가적 태도」란 글에서‚魯迅의「阿Q」나

「孔乙己」는 魯迅의 小說家的 才分의 표현으로는 榮光일는지 모르나 그 꽃을 피게 한 흙은 中國을 為하여서는 羞恥요, 侮辱이다. 今日의 中國에는 아킬레스가 없고 阿Q만이 있는 것이다. 關羽〮張飛는 阿Q와 孔乙己로 退化해버린 것이다.‛

고 주장하였다.33 이광수의 이런 견해는 극히 편협하다고 판단되기도 하였으나34, 그렇다고 해서 이광수가 루쉰을 전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단편소 설「만영감의 죽음」은 루쉰의「아Q정전」의 영향이 투영되어 있다. ‘루쉰의 아 귀와 비슷한 점이 있어서, 인생의 한 표본으로 썩 재미있는’ 박선달이란 실제 인물에서 소설 주인공 만영감을 그렸다는 지적도 있다.35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광수가 루쉰문학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루쉰과 루쉰문학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토로한 작가로는 한설야(韓雪野) 를 들 수 있다.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귀국한 뒤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등단한 한설야(1900-1976)는 프롤레타리아문학에 관심이 많아 1927년부터 카프에 가담하였고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5년에 석방된 인

32 김하림,「韓國에서의 魯迅受容樣相」,『중국인문과학12』, 1993, 540-542면 참조.

33 이광수,「戰爭期의 作家的態度」, 『조선일보』, 1936.1.6. (『이광수전집』16, 삼중당, 242 면에서 재인용.)

34 김하림, 앞의 글, 534-535면.

35 김윤식,『이광수와 그의 시대』3, 한길사, 1986, 934-9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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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다. 그는 감옥에서도 루쉰작품에 나온 인물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으며 훗 날 창작에 영감이 되었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다.

로신의 소설들에서 철학적 깊이를 발견하고 일종의 동양적인 풍격을 감촉하게 되여 감옥 에서도 로신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출옥 후에 쓴 나의 단편들인「모색」과「파도」기타에 취급된 인테리들은 로신의 소설「광 인일기」,「공을기」에서 적지 않은 암시를 받은 형상들이다.36

또한 한설야는‚나는 루쉰의「고향」을 생각했습니다. 또 형 이기영의「고향」

을 생각했습니다. 어찌 내게도 한 편의 아니, 몇 편의 ‘고향’이 없을소냐? 하는 자만과 자책을 스스로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3부작『탁류』의 제1부인「홍수」

를 탈고하고 중편「귀향」을 쓰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경과 관심의 한 모퉁이는 장편『황혼』의 일부에도 나타나 있습니다.‛37라고 하여 1939년에 쓰 어진 그의「귀향」등에 루쉰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한설야는 이후에도 루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처음 우리들은 로신의 혁명정신과 함께 인도주의적 측면에 많이 이끌렸으며 그를 계몽사 상가이며 인도주의자로서 보았다. 이것은 고리끼의 초기 작품들이 소개되었을 때에도 그의 인도주의적 측면에 끌렸던 사정과도 방불하다. 로신의 초기 작품들에는 확실히 인도주의 사 상이 강하게 내비치었던 것이 사실이다.38

위에서 보듯이 당시 한국 지식인들은 주로 혁명가, 인도주의자와 계몽사상가 의 입장에서 루쉰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 5.4문학혁명 시기의 루쉰문 학에 관심을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이런 루쉰 연구열풍은 1937년 중일 전쟁의 발발과 함께 중단되었다.

조선어 폐지, 창씨개명 등으로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드는 일련의 정책과 함

36 한설야,「로신과 조선문학」,『조선문학』 10월호, 1956. (최웅권,「현대조선에서의 루쉰의 영향과 수용」,『중국현대문학』제6호, 203면에서 재인용.)

37 한설야,「고향에 돌아와서」,『조선문학』2권8호, 1936, 100면. (김하림,앞의 글, 536면에서 재인용)

38 한설야,「로신과 조선문학」,『조선문학』 10월호, 1956. (최웅권,「현대조선에서의 루쉰의 영향과 수용」,『중국현대문학』제6호, 198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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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루쉰이 금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식민지시기 일본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조선총독부 금지단행본 목록』에 의하면『아Q정전』,『루쉰선집』,『루 쉰문집』등 루쉰의 작품이 금지도서목록에 수록되어 있다.39 이로써 당시 한국에 서 루쉰의 저작이 금서가 될 만큼 상당히 광범하게 읽혔음을 가늠할 수 있다.

식민지시기 한국에 번역 소개가 되었던 루쉰의 작품은 모두 단편소설이었으나, 작가로서 끊임없이 기존 세력에 맞서 대항하는 루쉰의 삶과 작품은 민족의 독립 과 더불어 정부의 수립이 시급하던 한국의 현실에서 적절한 지침서가 되기에 충 분한 것이었다. 홍석표도 역시 식민지시기에 한국인은 어느 나라보다 앞장서서 루쉰문학의 가치에 주목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