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후시기 문화계의 魯迅熱
3.2 반(反)루쉰론과 제3세계문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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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알 수 있듯이 쑤쉐린의 루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편파적이라 하겠다.
천팡밍이 ‘쑤쉐린의 비평 속에 루쉰문학의 내용이나 주제 또는 구성에 대한 분 석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단순히 품격과 개인적 원한의 문제에만 중점을 두었 다’81고 지적하듯이 뚜렷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진 쑤쉐린은 루쉰을 논할 때 문 학적〮예술적 측면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았고, 인격적 모욕으로 주관적 으로 공격했다. 이에 쑤쉐린의 반루쉰론은 국민당 체제를 옹호하는 방편이었으 며 중국 공산당과 좌파의 루쉰 수용 방식, 즉 ‘가공된 루쉰상’을 비판하고 있었 다는 견해도 있다.82 하지만 루쉰에 대한 긍정적 평가의 대립 면에 서 있는 쑤쉐 린의 비판도 우리에게 또 다른 해석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루쉰의 인격 혹은 그의 심리적 변화 등과 같은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공하여 루쉰 연구 의 범주를 넓혀주기도 했다.
3.2 반(反)루쉰론과 제3세계문학론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대만문학은 완전히 외성인 작가들에 의해 장악되 었다. 다수의 본성인 작가들은 언어전환 문제뿐 아니라 사상검열과 같은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일상생활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 가 중국에서 대만으로 건너 온 외성인 작가와 평론가에 의해 대만 언론계 및 출 판계는 반공문예의 획일적인 체제가 형성되어 이 체제로의 진입 역시 쉽지 않았 다. 대만작가 중리허의 삶은 이 시기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다.
중리허(1915-1960)는 1930년대부터 루쉰, 바진 등 중국작가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고 창작과 문학관에서 모두 루쉰문학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중리허의 초기 창작에서 루쉰문학의 모방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가령 1937년 창작한 최초의 작 품「이발사의 연애(理髮匠的戀愛)」에서 ‘나는 까닭도 모르고 겁을 먹고 있는 것 을 아닐까?(我怕得有理?)’라는 「 광인일기 」 에 나타난 대사를 사용한 바 있다.
81 陳芳明,「魯迅在台灣」,『典範的追求』, 聯合文學出版社, 1994, 324면.
82 최진호,「한국의 루쉰 수용과 현대중국의 상상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100-101면. ‚쑤쉐린은 공산당의 선전문화에 대한 문화전의 승리를 위해 루쉰을 공격 했다. 냉전 시기 타이완에서는 루쉰의 문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루쉰 수용 방식 을 비판했던 것이다. 즉 중국 공산당의 루쉰상이라고 이해된 루쉰상을 비판한다. ‘상상된 루 쉰’과 대비해 타이완의 위상을 설정하고, ‘오염’된 루쉰과 좌파 문학 대신, ‘정화’된 타 이완 문학을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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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8년 만주국에서 생활을 한 바 있으며 1941년부터 가족을 데리고 베이징 에서 지내는 등 중국에서 총 8년의 세월을 보냈고 1946년에 다시 대만에 돌아왔 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평생 문학을 하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창작하 기 시작하였다. 1945년 발표한 소설집 『 협죽도(夾竹桃)』 에는 냉소적인 시선과 날카로운 필법으로 사람들의 비도덕적이나 추악한 모습을 비판했기에 루쉰과 유 사한 점이 있고, 일기에도 여러 번 자주 루쉰을 언급하였다.83 1947년 중리허는 페렴으로 3년 간 병원에서 요양하게 되었는데, 입원하는 동안 루쉰의 작품을 가 장 많이 읽었고,「축복」과『화개집(華蓋集)』등을 통해 루쉰의 사상을 체득했다 고 한다. 당시 중리허는 소설『고향』의 집필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의 일기를 보면 그가 루쉰의「술집에서(在酒樓上)」와「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기 시작했나 (我怎麼做起小說來) 」 등 글을 참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4 일본학자 사와이 노리유키(澤井律之)도 중리허와 루쉰의 동명 소설「고향」을 비교하여 두 작품 은 구성과 서술에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였다.85
그러나 정치탄압으로 중리허의 동생들과 친구 란밍구가 살해당했고, 중리허는 병중으로 살아남았으나 공권력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한참동안 펜을 들지 않았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 중리허는 다시 창작을 시작하여 문장회 에 투고하기도 했다. 1956년 그의 작품「입산농장(笠山農場)」이 문장회의 이등 상을 탔지만 결국 출판되지는 못했다. 외성인 작가들이 문단을 장악했기에 본성 인 작가들이 작품을 펴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대부분의 대만작가는 접촉이 없었 던 공산당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당연히 반공문학을 쓰지 못했다. 억지 로 반공 및 전투문예에 맞춰 글을 써내더라도 어색해서 퇴짜를 맞을 수밖에 없 었다. 중리허의 일기에서도 그런 당시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고생하며 창작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사회가
83 베이징에서 쓴 중리허의 일기는 1945년 9월 9일에서 1946년 1월 16일까지의 내용이 현존한다.
84 鍾理和,「民國三十九年四月三日日記」,『鍾理和全集』5, 92면.‚我讀〈在酒樓上〉。寫「如此 故鄉」之一的〈竹頭庄〉,約得一千字。眼高手低,筆不從心,寫來深覺惱恨。魯迅引過他所忘記 了名氏的人的話:要極省儉的畫出一個人的特點,最好是畫他的眼睛。然後說常在學這一種方法,
可惜學不好。然而,於我,最感苦惱的,還是會話的處理。”
85 澤井律之,「兩個《故鄉》」, 中島利郎 편,『台灣新文學與魯迅』, 前衛出版社, 2000, 99-102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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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글을 받아들이질 않는다…86
전투문예가 범람했다. 설마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이겠는가? 어차피 우리도 억지로 따라잡을 필요가 없다. 문학은 위조할 수가 없다. 우리는 자신에게 충실하면 될 것이고 구태여 다른 것을 따질 필요가 있겠느냐.87
중리허의 이런 문학관은 루쉰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루쉰처럼 진실에 충실한 문학을 쓰는 동시에 문학의 힘을 빌려 사회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창작도 루쉰의 문학을 계승하여 짙은 사회의식을 기저에 깔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 식민지 경험이 없는 전후세대가 문단에 나타났는데, 과 거 있었던 두 번의 루쉰열풍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청년들은 루쉰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국민당과 우파 지식인에 의한 왜곡된 루쉰 평가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루쉰에 대해 부정적 인식과 선입견을 가 지게 되었다.
루쉰문학에 대한 비평들을 발표함으로써 독자에게 편파적 시각을 심어주던 작 가로 천시잉(陳西瀅)과 량스추를 들 수 있다. 천시잉(1896-1970)은 1920년대 중국 에서 이미 루쉰과 여러 번의 필전을 벌인 적이 있으며 「즈모에게(致志摩)」와 같은 비평문을 통해 루쉰을 공격한 바 있다. 그는 루쉰의『중국소설사략』이 일 본 학자 시오노야 온(塩谷温)의『지나문학개론강화(支那文学概論講話)』를 표절 한 것이라고 모함하였다.88 1964년 천시잉의 평론집『시잉잡담(西瀅閒話)』이 대 만에서 중간(重刊)되었고, 이듬해 바로 재판되었는데 천시잉의 언설이 당시 대만 에서 인기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 책에 루쉰을 공격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아 당시 대만독자에게 일정하게 부정적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시잉은
『시잉잡담』에서 루쉰의「아Q정전」에 대해 표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하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비판에 초점이 있었다.
86 鍾理和,「鍾理和致鍾肇政函」,『鍾理和全集』6, 29면.
87 鍾理和, 위의 글, 46면.
88 陳源,「致志摩」,『晨報副刊』, 1926.1. (臺靜農 편,『關於魯迅及其著作』, 未名社, 1926, 39면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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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루쉰선생의 인격을 존경하지 않는다 해서 루쉰의 소설도 함께 부정할 수는 없다. 또 한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의 다른 작품도 칭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열 풍(熱風)』에 수록된 몇 편의 글을 제외한 그의 잡문이 읽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89
천시잉은 루쉰의 성격부터 문학창작까지 모두 부정적 평가를 했던 것이다. 그 의 견해는 루쉰의 작품 및 관련서적의 유통이 잘 안 되던 당시에 독자들에게 루 쉰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킨 것이다.
량스추(1903-1987)도 역시 천시잉과 같은 입장에 서 있었고,『시잉잡담』의 서 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량스추는 천시잉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후반에 루쉰과 논쟁을 벌인 바 있었는데, 단순히 인신공격만 할 줄 알았던 반루쉰 비평가들과 달리 그는 루쉰과 번역문제 및 계급문학에 있어서 사상적 차이 때문에 서로 엇 갈린 의견을 드러내었다. 문학에 대해서 루쉰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강조한 반면, 량스추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우파문학을 주장했다. 두 사람의 논쟁이 결국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끝이 났고, 량스추가 대만으로 건너 옴에 따 라 논쟁의 상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만의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루쉰의 편을 드는 자가 있더라도 발언권이 없어서 량스추의 공격에 반박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량스추는『편견집(偏見集)』이란 자신의 비평집을 대만에 서 다시 펴냈는데, 이 책에 루쉰과 필전을 벌이던 시기에 쓴 비평문 여러 편을 수록하였다.『시잉잡담』처럼 큰 인기를 얻었던『편견집』이 대만 독자에게 량 스추의 일방적 관점만 보여줬으며 루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 다. 그는「루쉰에 대하여(關於魯迅)」란 비평에서 루쉰문학이 금서가 됐다는 것 을 반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루쉰의「아Q정전」및『중국소설사략』을 크게 칭찬했으나, 찬사보다 비판이 오히려 더 많았다.
량스추(1903-1987)도 역시 천시잉과 같은 입장에 서 있었고,『시잉잡담』의 서 문을 써주기도 하였다. 량스추는 천시잉과 마찬가지로 1920년대 후반에 루쉰과 논쟁을 벌인 바 있었는데, 단순히 인신공격만 할 줄 알았던 반루쉰 비평가들과 달리 그는 루쉰과 번역문제 및 계급문학에 있어서 사상적 차이 때문에 서로 엇 갈린 의견을 드러내었다. 문학에 대해서 루쉰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을 강조한 반면, 량스추는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우파문학을 주장했다. 두 사람의 논쟁이 결국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끝이 났고, 량스추가 대만으로 건너 옴에 따 라 논쟁의 상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대만의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루쉰의 편을 드는 자가 있더라도 발언권이 없어서 량스추의 공격에 반박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량스추는『편견집(偏見集)』이란 자신의 비평집을 대만에 서 다시 펴냈는데, 이 책에 루쉰과 필전을 벌이던 시기에 쓴 비평문 여러 편을 수록하였다.『시잉잡담』처럼 큰 인기를 얻었던『편견집』이 대만 독자에게 량 스추의 일방적 관점만 보여줬으며 루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켰 다. 그는「루쉰에 대하여(關於魯迅)」란 비평에서 루쉰문학이 금서가 됐다는 것 을 반대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루쉰의「아Q정전」및『중국소설사략』을 크게 칭찬했으나, 찬사보다 비판이 오히려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