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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 비평가 루쉰과 루쉰 서거 11주년 강연회

2. 전후시기의 루쉰 이해

2.1 계몽 비평가 루쉰과 루쉰 서거 11주년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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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루쉰이 금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식민지시기 일본총독부 경무국에서 발행한『조선총독부 금지단행본 목록』에 의하면『아Q정전』,『루쉰선집』,『루 쉰문집』등 루쉰의 작품이 금지도서목록에 수록되어 있다.39 이로써 당시 한국에 서 루쉰의 저작이 금서가 될 만큼 상당히 광범하게 읽혔음을 가늠할 수 있다.

식민지시기 한국에 번역 소개가 되었던 루쉰의 작품은 모두 단편소설이었으나, 작가로서 끊임없이 기존 세력에 맞서 대항하는 루쉰의 삶과 작품은 민족의 독립 과 더불어 정부의 수립이 시급하던 한국의 현실에서 적절한 지침서가 되기에 충 분한 것이었다. 홍석표도 역시 식민지시기에 한국인은 어느 나라보다 앞장서서 루쉰문학의 가치에 주목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40

2. 전후시기의 루쉰 이해

1945년 한국의 광복은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패망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오히려 극심한 혼란에 빠져 들었다. 해방이 한국의 주체적인 힘으 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산물이었으므로 새로운 국가 건 설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결국 남북한으로 나뉘어 자 본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소련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고 세계냉전의 현장이 되 고 말았던 것이다. 1948년 남북한 단독정부가 세워진 이후 성립된 ‘분단체제’는 현재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해방 이전에는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제국주의 아 래 민족을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가가 가장 큰 문제였다면 해방 이후에는 독립 된 민족국가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초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제의 해결은 이데올로기적 제한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2.1 계몽 비평가 루쉰과 루쉰 서거 11주년 강연회

루쉰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해방 이후의 일이었다. 김광주와 이용 규가 공역한『노신단편소설집』이 바로 그것이다. 1946년 8월과 11월에『노신단

39 김하림, 앞의 글, 523면.

40 홍석표, 앞의 책, 14-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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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소설집 』 (서울출판사) 제1집과 제2집이 각각 출판됨으로써 한국에서 마침내 루쉰 작품이 체계적으로 번역된 것이다. 이것은 해방 직후 전쟁으로 인해 중단 되었던 한국과 중국문단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는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김광주는 원본에 의거해 예전보다 비교적 세련된 한국어 문체로 번역했 기 때문에 과거 중역이나 오역의 문제를 극복했다.『루쉰단편소설집』의 출간은 중국과의 두번째 사상적 교류 및 접촉의 고조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먼저『루쉰단편소설집』을 펴낸 김광주에 대해 정종현은 그가 앞서 검토한 정 래동의 사상계보를 이어서 루쉰이 마르크스주의와 분리되어 개인적 자유와 자아 해방에 집중한 문학주의자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하였다.41 김광주(1910-1973)는 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 체류한 적이 있는데 의학을 전공하려 했다가 결국 문학 에 투신하였다는 점에서 루쉰의 삶의 궤적과 닮은 부분이 있다. 그는 중국문단 에 관심이 많아 루쉰, 궈모뤄, 바진 등의 작가에 대한 이해도 가지고 있었으며 1933년 1월 루쉰의 단편소설「행복한 가정(幸福的家庭)」과「술집에서」를 번역 해 발표하기도 했다.42 김광주는 상하이에서 한국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하면서 아 나키즘적 문예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중국문단의 상황을 한국에 체계적으 로 비평 소개하는 동시에 조선문단을 중국에 소개하려고도 시도하였다.43 김광주 는「중국문단의 현세 일별」이란 글에서‚루쉰이 1934년도에 와서 수필과 잡문 집『준풍월담(准風月談)』,『남강북조집(南腔北調集)』을 내놓은 것도 주목할 현 상이다. 이 두 수필집은 그의 독특한 풍자적 단문을 수집한 것으로 근자의 그의 괴로운 환경과 중국 문인의 수난 시기의 고민을 다소간 엿볼 수 있는 책자라고 생각한다.‛44라고 하여 루쉰의 잡문에 중국의 시대적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렴하면서 김광주는 상하이를 떠나야 했는데「상하이를 떠나며」라는 글에서 루쉰의 ‘거룩한 정신’을 떠올리고 있다.

41 정종현,「루쉰의 초상- 1960~1970년대 냉전 문화의 중국심상지리」,『사이間SAI』14, 국제한 국문학문화학회, 2013, 58면.

42 루쉰 저, 김광주 역,「幸福된 家庭」 ,『 조선일보 』 , 1933.1.29-2.5; 루쉰 저, 김광주 역,

「在酒樓上」,『第一線』3권1호, 1933.

43 김광주, 「 中國文壇의 現勢 一瞥: 1年間의 論壇〮創作界〮刊行物界 等 」 , 『 동아일보 』 , 1935.2.5-2.8; 김광주,「中國文壇의 最近動向」,『동아일보』, 1936.2.20-2.26; 金光洲,「朝 鮮文壇的最近狀況」,『文藝電影』1권4기, 1935.3.1; 金炳珉〮李存光,『中國現代文學與韓國』10, 延邊大學出版社, 2014. 등이 있다.

44 김광주, 「 中國文壇의 現勢一瞥: 1年間의 論壇〮創作界〮刊行物界 等四 」 , 『 동아일보 』 , 193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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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문단의 제일인자이면서도 하루한시도 안정된‘삶’을 갖지 못하고 때로 몸을 피하 고 때로 이름을 갈고 눈을 감기 전날까지 남빛 무명두루마기를 질질 끌며 그 긴소매에 두 손을 꽂고 사색하던‘루쉰’!‘아들이 장성하거든 문학가를 만들지 말라’고 유언에까지 저 버리지 않은 그의 심경이 얼마나 쓰라렸을고! 지조를 지키기 위하여 괴롭고 아프나‘청렴’

을 생명으로 삼고 죽기 전까지‘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남에게 분천이라도 받아들이지 말 도록 하라’고 아내에게 부탁하고 눈을 감은‘루쉰’의 거룩한 정신!45

루쉰이 죽을 때까지 문학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망명 중의 김광주에게 정신 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루쉰의 단편소설집을 펴낸 이후 1948년 잡지

『백민(白民)』에「루쉰과 그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에서 루쉰의 작품 을 간단히 소개하고 루쉰문학을‚모든 인간 생활의 위선과 비굴과 타락과 싸워 서 손톱만한 타협도 패배도 갖기를 싫어한 루쉰의 문학정신은 길이 중국민족과 함께 그의 작품 가운데서 용솟음쳐 흐르고 있을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46고 루쉰의 문학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다시 말하면 김광주는 중국의 국민성, 인간의 근본성에 입각하여 반봉건 의식을 통해서 폐습을 지적하고 폭로하는 지식인으로 루쉰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쉰단편소설집』의 출간은 한국의 루쉰문학 수용사의 중요한 분수령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를 계기로 해방 이후 한국에서 중단되었던 루쉰열이 다시 일어 났다. 루쉰의 작품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연극무대까지 올려져 1946년 서울에서 루쉰의『아Q정전』이 공연되었다. 그리고 1947년 10월 18일 루 쉰 서거 11주년을 기념하는 강연회도 서울대학 문리과대학에서 열렸으며 루쉰의 생애 및 경력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해방 전부터 루쉰을 자세하게 비평, 소개하 여 루쉰연구의 권위자로 불리던 정래동은『동아일보』에「위대한 중국작가 루쉰 의 회상」을 실었다.47 이 강연회는 당시 한국 해방공간에서 루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근거이다.

45 김광주,「上海를 떠나며: 流浪의 港口에서」,『동아일보』, 1938.2.18-19.

46 김광주,「루쉰과 그의 작품」,『백민』, 1948.1, 24-25면.

47 정래동, 「 偉大한 中國作家 魯迅의 回憶上: 그의 紀念講演會를 열면서 」 , 『 동아일보 』 , 1947.10.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