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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문학에 대한 문인들의 논의

1. 식민지시기 신문학운동 중의 중국문학과 루쉰

1.2 루쉰문학에 대한 문인들의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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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루쉰문학에 대한 문인들의 논의

1920년대 장워쥔 외에도 루쉰을 언급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차이샤 오첸은 1925년『대만민보』에 발표한「중국신문학개관(中國新文學概觀)」22이란 글에서 신소설에 대하여 루쉰의「공을기」를 예로 삼아 리얼리즘 경향을 띤 작 품으로서 평범한 인물들을 묘사하여 삶에 대한 영구적 비극성을 잘 드러냈다고 분석한 바 있었다. 한편, 딩이(定一)는 1929년 11월『대만신민보』에 게재한「곡 해 제일(曲解 第一)」란 글에서 루쉰의「화개집(華蓋集)」에 나온 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병도 없이 신음하는 자가 있겠어? 나는 그들이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 속의 답답함을 풀 수 있는 곳이 없어서 글이나 소설이나 시가 등을 통해 뜻을 표하는 것이지.…루쉰이 말하기를 ‘말을 하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은 모두 실패자의 상징인 듯하다.

운명과 악전고투 중인 자들은 이것들을 고려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면 누군가 루쉰에게 말할 것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과 글을 통해 마음이 완전 히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필요한 전제는 그것이 반드시 불만의 외침 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조소든 욕설이든 불평과 불만의 탄식이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마음 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명인 것이다.’23

딩이는 위와 같이 루쉰의 말을 빌어 식민통치를 받은 대만에서 터져나온 모든 말과 글이 전부 병들어 아파서 앓는 소리를 내짖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일본 제 국에 대한 대만사람들의 저항정신이 생생하게 전해진다고 하겠다.

1930년대부터 대만 신문학은 ‘성장기’(1931-1937)로 접어들어 문학운동 및 문 예사조가 고조되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과 함께 대만에 대한 통치방식이 다시 엄격해지면서 대만 지식인들은 이제 더 이상 정치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22 蔡孝乾,「中國新文學概觀」,『臺灣民報』3권12-17호, 1925.4.21-6.11.

23 定一,「曲解 第一」,『臺灣新民報』282호, 1929.11.3, 8면. 원문:‚豈有無病而竟好呻吟的?

我想他們都是不得不呻吟的、都是懷著悶悶之情而無處可訴、所以發表于文章、小說、詩歌、都是 有所寄託。…魯迅說:「講話和寫文章、似乎都是失敗者的象徵、正在和運命惡戰的人顧不到這 些。」有人向他說:「還有許多人講話和寫文章、還可以證明人心的沒有全死。可是這裡需要有分 別、必需要是一種不平鳴的呼聲、不管是冷嘲或熱罵、纔是人心未全死的證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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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대만 지식인들은 표면적인 반식민지배 계몽운동을 대신해 저항정신을 내 면화하며 문학창작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대만 지식인들은 잇달아 각종 문학 단체를 조직하여 그에 따라 여러 문예잡지가 창간되었다. 이를테면 ‘남음사(南音 社)’는 문예잡지『남음(南音)』(1932)을, ‘대만문예협회(台灣文藝協會)’는『선발부 대(先發部隊)』와『제일선(第一線)』(1934)을, ‘대만문예연맹(台灣文藝聯盟)’은『대 만문예(台灣文藝)』(1934)를, ‘대만신문학사(台灣新文學社)’는『대만신문학(台灣新 文學)』(1935)을 발행하였다. 그 가운데 루쉰에 대한 글은 『남음』에 가장 많이 실려 있다. 1932년 3월『남음』1권 5호에 루쉰이 번역한 에로센코의 동화「연못 가(池邊)」가 실렸고, 루쉰의 전기인「루쉰자서약전(魯迅自敘傳略)」은『남음』1 권 11호에 게재됨으로써 대만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일본 식민당국의 ‘국어(일어)정책’이 지속됨에 따라 일본어에 능통하거나 일본 에 유학을 갔다 온 지식인의 수가 늘어났다. 대만작가는 일본 문단에 등단할 정 도로 문학 수준이 높아졌으며 신문학운동의 성과가 점차 보이기 시작하였다.24 1920년대에 비하면 1930년대 이후 루쉰문학에 대한 비평이나 소개는 많이 줄어 들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만사람이 루쉰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1930 년 6월 대만 지식인에 의해 씌어진 최초의 중국신문학 논저인『중국신문학개관 (中國新文學概觀)』25의 저자인 예룽중(葉榮鐘)은『남음』에서도 루쉰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중국신문학개관』에서‚그가 ‘인간의 고통’과 위대한 ‘시대성’

에 대해 이렇게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불후의 명작이 될 만하다.

하물며 그의 높은 예술적 기교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내용적으로든 형 식적으로든 모두 완벽한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이 세계 여 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것이 결코 놀랍지 않다. ‛26고 하여

「아Q정전」을 중심으로 루쉰을 높이 평가한 바 있는데,『남음』에 발표한「문 예시평(文藝時評)」이란 글에서도 루쉰에 대한 애정을 밝히며 루쉰이 좌경한 이 후로 대만에서 그의 작품을 쉽게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24 1934년 10월 양쿠이(楊逵)의「신문배달부(送報伕)」, 1935년 1월 뤼허뤄(呂赫若)의「소달구 지(牛車)」및 장원환(張文環)의「아버지의 얼굴(父親的臉)」, 1937년 룽잉쭝(龍瑛宗)의「파 파야 마을(植有木瓜的小鎮)」등의 일어 창작 작품들이 일본문단에 나온 바 있다.

25 葉榮鐘,『中國新文學概觀』, 東京, 新民會, 1930. (葉芸芸외 편,『葉榮鐘早年文集』, 晨星出 版, 2002에 수록됨.)

26 葉芸芸외 편, 위의 책, 24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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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蔣)황제가 즉위하자마자 중국에서 공산당을 제거하는 비참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좌익작가들은 살해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여기저기로 망명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존경 하고 사랑하는 루쉰도 그 중의 한 명이다. 나는 루쉰이 언제부터 좌경했는지, 어느정도 좌 경했는지도 모르고 있다. 나는 그의 좌경에 대해서 좋지도 싫지도 않다. 나는 단지 그의 작 품을 굉장히 좋아하는 독자일 뿐이다. 우리는 1929년『벽하역총(壁下譯叢)』이 출판된 이후 로 그의 작품들을 더 이상 손에 넣지 못해 씁쓸함을 느끼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루쉰이 좌경한 뒤 쓴 작품을 접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어 려울 것이다….지금의 루쉰은‘손으로 글쓰기보다 발로 도망가기만 해도 무척 바쁘니까.’

루쉰 본인이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루쉰의 현황이 걱정되는 동시에 나는 언론통제에 대해서도 악렬하다고 생각한다. 언론 통제로 인해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구박받았고, 얼마 나 좋은 작품들이 파괴되었는지 모른다.27

위에서 봤듯이 예룽중은 일본을 거쳐서야 루쉰의 전향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장제스(蔣介石)의 공산당 박해 행위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중국 좌익작가들의 처 지를 동정했다. 또한 이를 매개로 대만에서의 언론통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드러내었다. 양제민은 예룽중이 표면적으로 루쉰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만, 실질적으로 일본의 식민정책이 ‘장황제’와 다름 없다며 언론 통제를 우회적 으로 비판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28 예룽중을 통해서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 아 래 대만과 중국 간의 문화교류는 아주 제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학자와 교류를 통해서 루쉰의 근황이 알려진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문단에는 루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루쉰의 작품 및 관련 비평 소개들이 대량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1932년 이노우에 코바이(井上紅梅)의『루 쉰전집』(改造社, 1935), 사토 하루오〮마스타 와타루의『루쉰선집』(이와나미문고,

27 擎雲(葉榮鐘),「文藝時評」,『南音』1권3기, 1932.1.22. 원문:‚他自從蔣皇帝登極以來,中國 鬧了好幾次的清共慘案。幾多有為的左翼作家,殺頭的殺頭,投獄的投獄,其餘便是逃來逃去在亡 命著。我們所敬愛的魯迅先生也是其中的一個。我卻不知道魯迅是於何時左傾的,是左傾到什麼程 度的。而且我對他的左傾也沒有感到特別的愛憎。不過我是很愛讀他的作品的一個平凡的讀者罷了。

我們自從「壁下譯叢」─一九二九年出版─以來至今日完全不能接到他老人家的作品,所以很感到 寂寞。我很希望在不遠的將來能夠接到左傾以後的魯迅的作品,但這或者是很為難的事吧。…現在 的魯迅「是用手寫還不及用腳跑的忙」這是魯迅對他講的哩。他老人家的亡命生活不知道什麼時候 才能夠休止,實在令人記掛也令人可惜,同時也使我感到壓迫言論之可惡,因為言論的壓迫不知道 推殘了多小的天才,減殺了幾多的好作品呀。‛

28 楊傑銘,『魯迅思想在台傳播與辯證1923-1949—一個精神史的側面』,中興大學台灣文學研究所, 석 사학위논문, 2009, 7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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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루쉰 서거 뒤 바로 나온『대루쉰전집』(改造社) 등이 그 예이다.29 따라 서 일본에 있던 대만 유학생들은 일본어 번역본을 통해 루쉰의 작품을 읽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 마스타 와타루의『루쉰전』도 1934년 12월에서 1935년 4월까 지 『 대만문예 』 에 번역되어 연재되었다.30 그런데 대만 작가 중리허(鍾理和)는

‚그 당시 가오슝, 자이 등 각지에서 신문학 소설을 구입하곤 했다. 당시 대륙에 서 5.4운동이 일어난 뒤 신문학은 갑자기 한바탕 비바람처럼 거세게 일었다. 북 신서점에서 출판한 루쉰, 바진, 위다푸, 장즈핑 등의 선집들도 대만에서 손에 넣 을 수 있었다.‛고 루쉰에 대한 어린 시절의 독서경험을 회고하고 있다.31 즉, 대 만에서는 일본 학자들의 논저를 통해서 루쉰을 이해하는 경로도 존재하였지만, 중국어로 된 루쉰의 저서가 중국에서 비공개로 수입되어 유통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예룽중 외에도 저우딩산(周定山)은 1932년 7월『남음』에 발표한「문학의 폭 군(文學的暴君)」이라는 글에서 혁명문학의 입장에 서있는 첸싱춘(錢杏邨)의 루 쉰 비판에 대해‚시대적 가치가 없다고?…그럼 혁명군의 위엄을 드러내지 않은 문학은 모두 반동문학이 되는 건가? 물어봅시다. 궁핍한 백성들의 비명을 그리 면 안된단 말인가. 아, 문학의 폭군이로소.‛32라고 하여 루쉰을 공격하는 첸싱춘 을 ‘문학의 폭군’이라 부르며「죽어버린 아Q시대」란 그의 논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예룽중도 마찬가지로 ‚ 십 여 년의 신문학운동은

「아Q정전」을 탄생시킨 것만 보더라도 무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평

「아Q정전」을 탄생시킨 것만 보더라도 무의미했던 것이 아니다. 비록 어떤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