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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문학을 이식한 한국식 아나키즘과 저항정신

1. 식민지시기 조선문단의 루쉰 수용

1.1 루쉰문학을 이식한 한국식 아나키즘과 저항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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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루쉰문학의 한국 전파와 수용양상

1. 식민지시기 조선문단의 루쉰 수용

한국은 19세기 말부터 근대적인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 으나 1910년 식민지로 일본에 편입되면서 국권을 상실했다. 이런 배경에서 중국 현대문학과 루쉰문학은 근대적 민족계몽의 모범으로 비춰져 한국 지식인들로부 터 주목을 받았다. 루쉰문학에 표출된 반봉건계몽주의 정신, 또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문제의식 등이 근대 한국의 사회적 요구와 부합되었기 때문이 다. 특히 이 시기 한국에서 루쉰문학이 무엇보다 중시되었던 이유중의 하나는

‘루쉰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구원이나 선언적으로 제시되는 이상(理想)을 거부 하고, 고통스러운 자기해부를 거쳐 내부로부터의 철저한 자기부정의 형식을 통 해 주체적으로 희망을 만들어가는 것’1이기 때문이었다.

1.1 루쉰문학을 이식한 한국식 아나키즘과 저항정신

루쉰의 일기와 편지에 기록하였듯이 중국에서 루쉰과 직접적 교류경험이 있었 던 조선인은 오상순(吳相淳), 이우관(李又觀), 류수인(柳樹人), 신언준(申彥俊), 이 육사(李陸史) 등이었다.2 한국의 문학잡지『페허(廢墟)』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던 오상순(1894-1963)은 1921년『페허』가 폐간되자, 중국 베이징에 갔으며 루쉰, 저 우쭤런, 러시아 시인 예로센코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의 에스페란토운동베이징세 계어학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오상순은 또한 아나키스트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일조하였던 이우관(1897-1984), 본명 이정규를 데리고 저우쭤런을 방문했는데, 그 후 이우관도 루쉰, 저우쭤런과 교류하기 시작했음은 루쉰의 일기를 통해 알려져

1 홍석표,『루쉰과 근대 한국- 동아시아 공존을 위한 상상』,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14-18면.

2 루쉰과 저우쭤런(周作人)의 일기에 나오는 조선인과의 자세한 접촉 흔적 및 영향관계에 대해 서는 李政文,「魯迅在朝鮮」(『世界文學』4기, 1981, 32-43면);楊昭全,「魯迅與朝鮮作家」

( 『外國文學研究』2기, 1984, 129-134면);김시준, 「魯迅이 만난 韓國人 」(『중국현대문학 13』,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1997, 127-163면); 김시준,「流亡在中國的韓國知識分子和魯迅」

(『중국현대문학17』, 1999, 1-13면); 홍석표,「예로센코, 노신, 주작인의 세계주의적 경향과 동아시아 지식인의 사상적 공명 」 ( 『 중국어문학지 』 53권, 중국어학회, 2015, 221-250면)등 논저를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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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늘 한 번 대면의 기회를 가지려고 했더란 말을 듣고, 외국의 선배 앞이며 처 소가 처소인만큼 다만 근신과 공손할 뿐인 나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아줄 때는 그 는 매우 익숙하고 친절한 친구이었다.”12고 직접 언급했다. 루쉰 서거 후 나흘만 인 1936년 10월 23일 이육사는『조선일보』에「루쉰추도문(魯迅追悼文)」을 발 표했는데 추도문이라기보다 ‘루쉰문학론’이라 할 만한 깊이 있는 비평이었다.

이것은 루쉰문학을 탐독해온 이육사가 루쉰의 서거 소식을 접하자 그동안 축적 해온 연구성과를 공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3 당시 조선문단에서 예술과 정치 의 상관성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였는데 “오늘날 우리의 조선문단에는 누 구나 할 것 없이 예술과 정치의 혼동이니, 분립이니 해야 문제가 어찌 보면 결 말이 난 듯도 하고 어찌 보면 미해결 그대로 있는 듯도 한 현상인데, 魯迅같이 자기 신념이 굳은 사람은 이 예술과 정치란 것을 어떻게 해결하였는가?…루쉰에 있어서는 예술은 정치의 노예가 아닐 뿐 아니라 적어도 예술이 정치의 선구자인 동시에 혼동도 분립도 아닌….”14처럼 루쉰의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그 해법을 모 색하려고 했다. 민족을 위한 독립운동은 정치적 행위인데 이런 정치이념으로 인 해 창작의 예술성이 훼손되지 않을까라는 한국 지식인들의 고민에 대해서 이육 사는 루쉰을 통하여 조선문단에 메시지를 던지면서 자신의 문학적 방향에 확신 을 갖기도 했다. 또한 그는 루쉰 정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아 치열한 시대정 신, 저항의식을 창작에 반영했다. 이육사는 소설「황엽전(黃葉箋)」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가자. 조금이라도 빨리 가자. 불빛을 볼 때까지.‛그들 중에서 한 사람이 굵은 목소리 로 외치는 것입니다.

‚암, 그래야지.‛또 몇 사람의 대답이 끝나면 모두들 침묵은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역시

‚가자‛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빨을 물고, 있는 힘을 다하여 전진합니다. 지나온 길이 얼마이며 가야 할 길 이 얼마인 것도 모르면서 죽으나 사나 가야 한다는 것밖에는, 그들은 한 사람도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15

12 이육사,「루쉰추도문」,『조선일보』, 1936.

13 홍석표, 앞의 책, 205-206면.

14 이육사, 위의 글.

15 이육사,「황엽전」,『조선일보』, 1937.10.11.(김용직 지음,『이육사전집』, 깊은샘, 99-101 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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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이육사의 묘사는 루쉰의『야초』의「과객(過客)」에 등장하는 인물 형상과 겹친 부분이 있다.

그건 안 됩니다. 저는 가야 합니다. 되돌아가봤자 거기에는 위선이 없는 곳이 없고, 지주 가 없는 곳이 없고, 추방과 감옥이 없는 곳이 없고, 가식적인 웃음이 없는 곳이 없고, 거짓 눈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것들을 증오합니다.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16

이처럼 이육사의 창작에서 루쉰문학에 드러난 ‘고독자로서 전진을 지속하는 강인한 정신’17을 동일하게 볼 수 있다. 이육사는 중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한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루쉰문학 및 중국 현대문학을 한국 에 소개하면서도 문학창작에 힘을 기울였다.

루쉰을 방문한 또 한 명의 조선인 문학가로 류수인(1905-1980), 본명 류기석, 필명 유서(柳絮)를 들 수 있다. 그는 1925년 스유헝(時有恆)의 안내로 루쉰을 알 게 되었고, 루쉰에게 작품을 번역하고자 하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그는 번 역 관계로 여러 차례 루쉰과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18 1926년 서울에서 발행되던 잡지『동광』에「광인일기」를 게재하였다. 그는 ‘광인의 목소리로 중 국인의 각성을 촉구한 루쉰의 계몽주의적 첫 외침’인「광인일기」를 주목하면서 조선인이 놓인 처지와도 맞아 떨어져 그 번역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류수 인의 번역은 유려한 문체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세계 최초로 루쉰 작품을 번역한 외국인으로서 중국어 원문에 따른 충실한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오상순과 마찬가지로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했던 류수인은 동아 시아 무정부주의자대연맹(東亞無政府主義者大聯盟)19을 조직하는 동시에 또한 언

16 루쉰,「과객」,『야초』,『루쉰전집』2, 169면.

17 홍석표,「이육사와 루쉰이 도달한 문학정신: 4.강인한 정신의 소유자 형상과 시의 사상성」, 앞의 책, 205-206면.

18 李政文, 앞의 글, 35-36면.

19 류수인은 1926년 12월 중국 잡지『민종(民鍾)』에 실린「동아시아무정부주의자대연맹을 조직 할 것을 주장한다(主張組織東亞無政府主義者大聯盟)」라는 글에서‚나는, 민족을 구별해서는 안 되지만, 식민지의 동지들이 첫째로는 먼저 본식민지를 해방하는 운동에 힘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목하 조선 민중이 사회혁명을 하려 할 때,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전에는 결코 사회혁명을 완성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柳絮,「主張組織東亞無政 府主義者大聯盟」,『無政府主義者在中國』, 湖南人民出版社, 1984, 489면. 홍석표, 앞의 책, 58면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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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계와 문단에서 활동하였다. 그는『중외일보』에 6회에 걸쳐「무산계급예술론」

20을 연재하였고, 리허린(李何林)이 엮은『중국문예논전(中國文藝論戰)』에「마르 크스주의 계급예술론에 대한 검토(檢討馬克思主義的階級藝術論)」등 마르크스주 의 진영의 무산계급예술론을 비판하는 논의를 발표함으로써 중국 비평계에도 영 향을 끼쳤다. 이처럼 류수인은 독립운동가로서 아나키즘 문예이론의 비평가로 활약하였으면서 한〮중 지식인의 교류를 구축하는 데 힘을 기울었을 뿐만 아니라, 루쉰문학의 사상적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깨달아 한국 최초로 루쉰 작품을 한국 어로 번역하여 루쉰문학의 수용에 개척가적인 역할을 하였다.

류수인의「광인일기」번역 이후 1930년대 양백화(梁白華)의「아Q정전」번역이 나왔고, 정래동(丁來東)과 김태준(金台俊), 김광주(金光洲) 등에 의해 루쉰문학 및 중국 현대문학에 대한 번역, 소개와 비평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에 서 중국 현대문학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1929년 개벽사에서 『중국단편소설집』을 냄으로써 한국 독자들은 이제 일본을 경유해서 들어온 서양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 점차 중국 현대문학 으로 시야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중국에서는 혁명문학논쟁이 일 어나 프로문학이 대두하고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었는데, 마침 한국 에서도 프로문예운동21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지식인들은 프 로문학을 중심으로 새로 형성된 중국문단에 관심을 쏟았으며 더욱 루쉰문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루쉰은 중국 현대문학 을 대표하는 문인으로서 한국의 신문과 잡지에 가장 많이 소개되었다. 이는

‘민족해방을 절박하게 요구하던 한국사회가 저항의식과 비판정신의 전범(典範)으 로서 루쉰문학을 그만큼 필요로 하고 있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22

중국소설『홍루몽(紅樓夢)』을 한국 최초로 번역한 양백화(1889-1994)는 1920 년대부터 중국문학의 전문 번역가로 알려졌으며 1920년 잡지『개벽』에 일본학 자 아오키 마사루(青木正兒)의「후스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胡適を中 心に渦いてゐる文學革命)」이라는 글을 번역해 발표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중국 신문학의 창작성과를 논하면서 ‚소설로 루쉰은 미래가 있는 작가이니 그「광인

20 유서,「무산계급예술신론」,『중외일보』, 1928.4.3-9.

20 유서,「무산계급예술신론」,『중외일보』, 1928.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