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후시기의 루쉰 이해
3.1 자유중국 문학의 선구자로서의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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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3.1 자유중국 문학의 선구자로서의 루쉰
광복 후 양극으로 치달은 좌우 이념대립으로 한국의 루쉰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진다. 정종현은 중국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 루쉰에 대해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 혹은 ‘중국 문화혁명의 리더이고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라고 한 마오쩌둥의 찬사는 ‘루쉰=빨갱이’의 도식을 성립시 켰다고 지적한 바 있다.59 마오쩌둥에 의해서 혁명 영웅으로 호명됨으로써 루쉰 이 중공과 분리할 수 없는 위상을 획득한 셈이다. 따라서 루쉰을 좌파로 간주하 거나, 아니면 공산당에 궁극적으로 저항했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등 이데올로기 적 규제로 인해 편면적인 루쉰 해석과 수용이 진행되었고, 루쉰에 대한 극단적 인 평가가 행해지기도 했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홍콩과 대만은 ‘자유와 민주’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정상적 근대화의 전범은 전 아시아 인민의 적인 중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자유중국’, 즉 대만이었기 때문이다.60 냉전 이후 국민당은 중공에 패배해 대륙을 잃어버린 상태로 대만에 근거지를 확보하면서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양국은 아시아 냉전의 최전선에 놓인 국가로서 반공진영으로 귀속되 어 공산당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대만은 한국의 ‘우방’으로 이해되었다. 그리 하여 중국과 대립하면서 대륙 수복을 준비하고 있었던 대만은 과거의 무능과 부 패 등 국민당의 구태에서 벗어나고자 약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1957년 주요섭은 ‘문화친선방문단’을 인솔하고 대만을 방문한 뒤 대만관 찰기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만의 근대적이고 세련된 모습을 전달하였다.『동아 일보』는 이무영,『경향신문』은 전숙희,『조선일보』는 송지영이 한국 대표적인 일간지에 한꺼번에 대만 기행문을 개재했는데, 이 기획을 통해 ‘반공-근대화-자 유중국’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려는 의도성을 엿볼 수 있다.61 다시 말하면
‘ 자유중국 ’ 의 문화나 문학이 중국의 정통 문화와 문학으로써 호명되었으며
59 정종현, 앞의 글, 57면.
60 최진호,「냉전기 중국 이해와 루쉰 수용 연구」,『한국학연구』39, 2015, 293면.
61 최진호, 위의 글, 293-29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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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문학’의 현대화 과정은 곧‘중국문학’의 현대화 과정인데, 현대화의 기원 은 바로 중국의 5.4운동이라고 이해되었다.62
195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중국은 인민들이 고통 받는 어둠의 땅으로 표상된다.
대만에 유학을 갔던 김준엽은 당시 대표적인 잡지였던『사상계』에서「중공국가 체제의 성립」,「중공의 인민지배기구」등 중국을 비판하는 논설들을 실었다. 그 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장은 인민대중의 희생 즉 물질적 궁핍과 자유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주장했다.63 한국에서 이와 같은 중공에 대한 비판 적 논설들은 1950년대 중반부터 대거 등장하였는데, 이때 중공은 억압적 독재국 가의 모습으로, 오히려 신해혁명 이후 변화가 거의 없는 혹은 오히려 일탈된 상 태의 공간으로 그려졌다.64
장기근(張基根)은『세대』에 발표한「중공의 아Q」란 글에서 중국에 대한 비 판을 제기하며 루쉰을 중국 민족을 구하기 위해 반봉건과 반제국 투쟁을 한 민 주투사라고 규정한다.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절망적이고, 또한 적막하드라도, 생존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 노신의 정신적 산아(產兒)인 아Q는 비록 신해혁명에서 죽었다 하드래도 그는 다시 민족 속 에 살아 그들을 억압하고 학대하고 침략하는 독재자와 침략자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 다.…반공의 자유 민주투사로서의 존재를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거늘 철두철 미 독재와 싸운 노신을 자기 진영의 전사로 철면피하게 선전하는 중공은 또한 아Q도 그들의 인민이라고 내세울 법 하다.65
그러면서 진화론적 사상의 기초를 둔 부르죠아 인테리의 魯迅은 끝끝내 공산주의자 되기 를 의식적으로 거절했고, 그의 휴머니즘은 끝끝내 어떠한 개인이나 민족의 억압에도 항거하 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기 魯迅은 좌익문인들과 아울러 독재자와 싸웠고, 봉건사상, 제국 침략주의와 싸운 철저한 민족주의자요, 개량적 진보주의자요, 자유주의자였던 것이다.66
위에서 보듯이 장기근은 루쉰을 공산주의 중국을 비판하는 자리에 놓았으며
62 최진호, 위의 글, 294면.
63 김준엽, 「중공의 인민지배체제」하,『사상계』5권12호, 1957.
64 최진호, 앞의 글, 291-292면.
65 장기근, 「中共의 아Q」,『世代』제1권6호, 세대사, 1963, 179면.
66 장기근, 위의 글, 1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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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공산당이 다스리고 있는 중국은 과거 아큐를 죽게 만든 세상과 크게 다르 지 않다고 암시했다. 뿐만 아니라 장기근은‚대만의 문학이란 바로 중국의 문학 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 대륙 본토를 중공에게 유린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대만의 자유중국정부가 중국을 대표하고 있는 거와 같다‛67며 대만이 곧 정통 성을 가진 합법적인 중국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3.2 ‘자유세계’의 일원에서 붉은 루쉰으로
루쉰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1936년에 이미 사망했다. 그러므로 루쉰문 학을 ‘중공’ 및 마오쩌둥의 호명과 상관없이 그 자체에 내포한 예술의 순수성과 인도주의의 관점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한국 지식인도 있었다. 좌익 혹은 우익이 아니라 중립의 입장에서 루쉰을 바라본 시각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박노 태는「루쉰과 위다푸의 세계」란 글에서 루쉰을 중국의 계몽적 신문학 운동을 만들어낸 선구적인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루쉰이 ‚ 인생을 위한 문학을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작가‛이며‚중국 사회와 중국 사람을 위하여 누구보다 분 개하고 동정한 계몽적 작가”라고 인정하였다.
그들, 루쉰과 위다푸은 결국 문학을 위한 문학을 결정하고 중국의 궁핍, 비참, 비굴, 죄 악, 압박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위하여 문학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자유 해방을 위한 문학을 하였다. 그들의 이념은 중국사회에 기초를 두었고 그들의 이상은 중국인민의 자유해방을 향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들의 문학은 역시 계몽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68
최진호는 박노태의 이런 루쉰 인식은 ‘공산화’ 이전의 시공간 속에서 해석할 여지를 마련한다고 해석하면서 루쉰을 ‘중공’ 등장 이전의 ‘중국’의 시공간 속에 배치시킴으로써 의미의 지평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69
박노태 외에도 희곡 번역가 오화섭은 새로운 문화의 형성과 관련해 구미의 연 극을 수입하거나 모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예술양식의 고유한 순수성의 개
67 장기근, 「황하로 흐르는 두 개의 조류」,『世代』제1권 5호, 세대사, 1963.
68 박노태,「魯迅과 郁達夫의 世界」,『신태양』제8권5호, 신태양사, 1959, 199면.
69 최진호, 앞의 글, 289-29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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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필요성을 제안하면서 루쉰을 언급한 바 있고70, 윤영춘도 역시 루쉰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정치의 영역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제안하였 다.71 그리고 차주환은 1965년 『 문학춘추 』 에 게재한 「 민족〮반항〮절망— 루쉰의 경우」란 글에서 루쉰이 문학에 이르게 된 길을 설명하면서 루쉰이 ‘비록 국민 당 정부의 탄압을 받아서 한때 피신도 하고 잡문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루쉰이 줄곧 추구한 것은 정치적 분열의 지양을 통해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루쉰은 ‘중국의 민족혼이 된다’72와 같이 민족주의자로서의 루쉰을 자리 매김시켰다. 차주환의 루쉰은 자유와 반공의 투사로서가 아니라 일본의 중국 침 략에 맞서서 싸우는 중국의 민족혼으로서 이미지화된 것이었다.73 이로써 한국에 서는 당시 중국에서의 루쉰 수용 방식과 별개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거리를 두고 보다 더 중립적으로 루쉰을 해석하는 여지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지성계를 주도하던『사상계』는 1960 년대 ‘중공’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중공을 여전히 세계 평화의 교란자로 파악하고 있었다.74 반면에 잡지『청맥』(1964)은 ‘중공’을 세계에 혁명을 수출하는 국가로 일컬었으며, 중국 대륙의 정당한 주권자로 인정 하였다.75 즉,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기존 이미지와 다른 시각이 등장하기 시 작하였다. 또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인식전환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기 도 했다. 말하자면 미국의 새로운 중국관과 ‘두 개의 중국론’에 의거해 중국을 새로 이해할 필요성이 생겨난 것이다.
민두기는 먼저 중국에 대한 기존과 다른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우리네 가 요즈음 화제로 삼고 있는 형태의 근대화는 중국에서 확실히 실패하였지만 공 산중국의 오늘의 형세 역시 일종의 근대화‛76라고 피력함으로써 중공은 독자적 인 근대화의 한 경로일 수 있음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한 자유주의를 대
70 오화섭, 「좌담회 제2 공화국에 바라는 문화정책」,『동아일보』4면, 1960.9.10.
71 윤영춘,「중국학문의 실체 자유중국을 다녀와서」,『동아일보』4면, 1962.6.2.
72 차주환, 「민족〮반항〮절망-魯迅의 경우」,『문학춘추』2권1호, 문학춘추사, 1965.
73 최진호, 앞의 글, 29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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