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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문학의 동아시아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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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게 수용되어 왔는데 이는 또한 루쉰문학의 폭과 깊이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생활의 위선, 비굴, 타락과 싸우려는 루쉰의 문학정신은 중국 민 족과 함께 걸어왔다. 따라서 루쉰은 중국의 문학과 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문화코드이다. 대만과 한국 역시 식민지라는 비슷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양국의 근대 역사.문학사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공통된 문화코드로 루쉰과 그의 작품을 수용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2. 루쉰문학의 동아시아 전파

중국에서 루쉰 연구는 양적, 질적으로 돋보이는 성과를 축적해왔음은 당연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마오쩌동에 의해 신격화되고 정치적으로 읽혀왔다. 그러다 개혁개방 이후에서야 다양한 방법론과 시각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루쉰 의 삶과 문학이 중국에서 ‘민족 및 문화 공동체의 통합의 매개로 작용하고 있 다’17는 점을 알게 해 준다.

이와 동시에 루쉰 문학이 오래 전부터 중국이라는 지평을 떠나 동아시아에서 보편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루쉰은 중국 이외의 동아시아 전역18에 수용되었고, 특히 일본.대만.한국에서 폭과 깊이를 갖춘 연구가 여태 까지 꾸준히 이어져왔다. 루쉰의 삶과 문학 속에는 근대의 보편적 모순과 고뇌 가 내재되어 있기에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과 사상적 좌표에까지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곤 하였다.

17 임명신, 앞의 책, 108-113면.‚중국에서 그의 사후는 물론 이미 생전에 국어 교과서에 빠지 지 않고 실림으로써 루쉰의 삶과 문학이 민족 및 문화 공동체의 통합의 매개로 작용하고 있 다는 점은, 일단 표면적으로 보아 큰 변동이 없는 듯하다. 다만 작품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평가와 감상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18 루쉰문학의 해외 전파와 세계적 수용에 대해서 張杰의『魯迅:域外的接近與接受』(福建教育 出版社, 2001)와 王潤華、潘國駒이 편집한 『 魯迅在東南亞 』 (八方文化企業, 2017)를 참고할 수 있다. 기타 동아시아 나라들 베트남.인도네시아.태국.싱가폴.말레이시아.필리핀 뿐 만 아니라, 미국.전 소련.체코.영국.독일.이탈리아 등 전세계 곳곳에서도 루쉰의 흔적 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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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일본

세계 최초로 외국인으로서 루쉰의 작품「광인일기」를 번역한 사람이 한국의 류수인19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루쉰이 가장 먼저 소개되고 널리 알려진 곳은 일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루쉰은 외국문호로서 거의 국민문학 수준의 대접을 받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학자 후지이 슈죠(藤井省三) 에 따르면 세계 최초로 루쉰을 소개한 글은 1909년 5월 1일 발간된 종합잡지

『일본과 일본인(日本及日本人)』508호로 그 해 3월에 출판된 루쉰과 저우쭤런 이 번역한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에 대한 기사보도였다.20 그 후, 아오키 마사루(青木正児), 사토 하루오(佐藤春夫), 마스다 와타루(增田涉) 등을 통하여 루쉰과 그의 문학사상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임명신에 따르면 루쉰을 매개 로 일본의 근대사 및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짐으로써 중국 문학 의 경계를 넘어 일본의 전후 사상사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 다.21 이처럼 끊임없이 오랜 기간의 축적을 거쳐 일본의 루쉰 연구는 중국만큼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왔다. 그 가운데 중국학자 다케우치 요시미 (竹內好)22가 일본의 루쉰 연구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며 그의 루쉰론 이 중국 및 한국학계에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일본의 루쉰에 대한 열정은 특히 남다르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루쉰의 대부분 의 저작이 번역되어 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두로『루쉰전집』23을 완역하여

19 한국의 류수인은 1927년에 세계 최초로 외국인으로서 루쉰의 작품을 번역했으나, 최초로 번

역된 것은 1922년 저우쭤런(周作人)이 일본어로 번역한「공을기」였다. 1922년 6월 4일 베이 징에서 발간된 일본어 잡지『북경주보(北京週報)』19호(北京遠東新信社)에 실렸다. (戈寶權,

「魯迅著作在日本」,『魯迅研究』1, 上海文藝出版社, 1980.)

20 藤井省三,「日本介紹魯迅文學活動最早的文字」,『復旦學報』2기, 1980.

21 임명신, 앞의 책, 108-113면.

22 베이징에서 2년간 유학했던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는 1943년 12월에 써낸 저서『루쉰』

(서광덕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3)은 향후 일본 루쉰 연구의 기반을 다진 대표작이다. 서 광덕도 다케우치 요시미의『루쉰』을 일본의 루쉰연구를 비롯한 중국문학연구 전체를 통틀어 명저로 꼽힌다고 평가한 바 있다. 그는‚문학가 루쉰이 계몽가 루쉰을 낳는 궁극의 장소‛라 고 표현한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규정은 지금까지도 루쉰 연구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광덕,「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근대비판과 루쉰연구」 , 중국현대 문학27, 2003, 1-25면.)

23 魯迅,『魯迅全集』전20권, 學習研究社, 198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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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 바 있다. 게다가「아Q정전」만 여덟 개의 다 다른 번역본24을 찾을 수 있다 는 점에서 일본 학술계는 물론이고 시민 차원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쉰은 일본 유학경험으로 인해 그 후로도 일본문단과 서로 깊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그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모리 오가이(森鷗外),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그리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문학에 영향을 받았고, 한편 그의 문학도 다자이 오사무(太宰治)25, 오에 겐자부 로(大江健三郎),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26와 같은 일본 문학사에서 높은 위치 를 차지하는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대만

해방 전부터 대만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주로 일본어 번역을 통해 루쉰과 그의 문학을 접하였으며 일본의 루쉰 연구 성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만은 1895년부터 일본에 할양되어 1945년까지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추 진되었다. 1919년 중국에서 오사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부터 대만의 신문 은 루쉰, 후스(胡適) 등의 작품을 소개하고 게재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작가와 소설을 문단에 도입하였다.

대만에서는 문학사적으로 두 번의 ‘루쉰붐(魯迅熱)’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1920년대 초기부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및 황민화정책이 실행되기 전까지이다.

당시 억압받는 피식민 상황에서 백화문 글쓰기의 본보기뿐만 아니라 약자에 대 한 연민과 반항정신을 지향한 루쉰의 사상은 대만작가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 았다. 또 한번의 루쉰열은 광복 이후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1946-47년 사이였다.

예로부터 대만과 중국의 관계는 밀접하였으나 문학의 교류는 태평양전쟁이 끝나 고 난 뒤 중국 좌익작가들이 분분히 대만으로 이주하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24 일본에서 발행된「 아Q정전 」은 竹內好(新 .舊譯本), 松枝茂夫, 增田涉, 高橋知己, 丸山昇, 駨田信二, 小田岳夫 등이 번역한 8가지 판본이 있다. (張杰,「日本的魯迅研究」,『魯迅:域 外的接近與接受』, 福建教育出版社, 2001, 207-209면.)

25 일본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1945년에 소설「석별(惜 別)」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루쉰의 일본 유학시절 이야기를 모델로 쓰여진 소설이다.

26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학창시절부터 루쉰문학을 즐겨 읽어왔으며 루쉰으로부터‘아큐’

란 인물형상을 계승하여 작품에서 모티브로 활용한 바 있다. 루쉰과 일본문단의 영향관계에 관해서 藤井省三의『魯迅―東アジアを生きる文学』(2011, 岩波書店)를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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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문화교류가 제대로 전개되지 못했다. 이 당시 루쉰열은 일본식 교육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 결과 1946년 루쉰 서거 10주년 기념을 계기로 신문과 문예잡지에서 루쉰에 대해 열렬한 토론이 일고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1947년 2.28사건 이후 1949년 국 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철수하여 통치하게 된 이후 반공이데올로기가 전면적으로 부각되었다. 그로 인해 중공에서 마오쩌동(毛澤東)의 주도로 ‘혁명적 인물’로 형 상화된 루쉰의 작품은 전면 금서가 되었다. 반공이데올로기로 인해 대만은 38년 동안 계엄 상태를 유지하다가 1987년에 계엄이 해제되면서 루쉰이 다시 활발하 게 연구되었다.

2.3 한국

루쉰의 수용에 있어서 한국의 경우는 대만의 루쉰 연구사와 유사한 궤적을 보 여준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매우 이른 시기에 루쉰을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식민 지배를 경험하면서 루쉰문학에 표출된 반봉건 의식과 전투정신을 받아들여 제국 주의 및 파시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사상적 힘을 얻었다. 1920년 양백화가 루쉰 이란 작가와 그의 작품「광인일기」를 한국으로 소개한 지 거의 백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27 1925년 봄, 류수인이 루쉰의 동의를 얻고「광인일기」를 한국 어로 번역하여 1927년 8월에 잡지 『동광』에 발표하였다. 그것은 세계 최초로 외국인으로서 루쉰의 작품을 번역한 것이었으며 한국에서 루쉰 연구의 서막을 올린 것이었다.

1930년대 초반과 해방공간에서도 대만의 경우와 비슷하게 루쉰 연구의 열풍이 일었다. 이광수가 1936년 발표한 단편소설「만영감의 죽음」도 루쉰의「아Q정전」

의 영향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28 루쉰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은 억압에서 탈출하려던 전반적 사회 분위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망

27 1920년에는 양백화가 일본학자 아오끼 마사루(青木正児)의「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

27 1920년에는 양백화가 일본학자 아오끼 마사루(青木正児)의「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