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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좌파 루쉰과 민족문학의 건설

2. 전후시기의 루쉰 이해

2.2 혁명 좌파 루쉰과 민족문학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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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2월『신조선 』에「민족문학과 민족주의문학」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민족혁명의 대중문학’으로서의 민족문학을 주장했다.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현 단계의 문학운동의 구호로서 제창된‘민족문학’은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규정한다면‘민족혁명의 대중문학’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민족혁명’은 그 2대 방향으로 반봉건주의와 반제국주의를 들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반봉 건주의와 반제국주의의 방향에서 이탈하여서는 조선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자주독립국가는 절대로 건설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늘날에 장황한 설명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대중 문학’은 민족혁명의 성격이 반봉건주의, 반제국주의의 방향을 취하는 이상 인민대중의 기 반 위에 서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응당 대중문학이어야 할 것이며, 근자에 문학대중화운동의 활발한 전개가 요청되는 것도 이유가 전혀 여기 있을 것이다.53

이명선은 ‘민족문학’ 건설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있어 1936년 중국좌익작가연 맹 내부에서 벌어진 ‘국방문학〮민족혁명전쟁 중의 대중문학 논쟁’에서 루쉰이 제 기한 ‘민족혁명전쟁 중의 대중문학’이란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 다.54 1948년 7월 이명선은『문학』에「루쉰의 문학관: 문예비평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는데,‚그의 일관한 전투적인 비판정신이 예리한 칼날과 같이 번득 이는 것이다.…이처럼 위정자가 어떠한 만행도 자행할 수 있는 중세 이상의 무 법천지에 루쉰은 생존했었으며 이러한 무법천지에서는 그로서는 소설보다도 잡 감문이 더 필요하고 더 편리한 투쟁의 무기였던 것이다.‛55고 루쉰과 그의 창작 에 대한 생각을 밝힌 바 있다. 그리하여 1949년에 이명선은 1919년부터 1936년 까지의 루쉰의 잡감문 27편을 번역해『루쉰잡감문선집』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이 절대절명(絕對絕命)의 경지에서 루쉰이 택한 것이 잡감문이며, 따라서 그것은 철두철 미 무기로서의 문학이었다. 루쉰의 글을 가리켜‘한번 붓을 들면 반드시 피를 흘린다’는 위다푸(郁達夫)의 말에는 아무런 과장도 없다. 이미 무기로서의 문학인 이상, 그것은 언제 나 생사를 내걸은 피비린내 나는 문학이여, 그 붓 끝에는 언제나 살기가 등등하다.56

53 이명선2007,「民族文學과 民族主義文學」,『이명선전집』2,보고사,면113.

54 홍석표,「이명선의 루쉰 비평과 루쉰 문예 입장의 수용」, 앞의 책 , 351-356면에서 참조.

55 이명선,「魯迅의 文學觀: 文藝批評에 對하야」,『이명선전집』2,보고사, 2007, 131-138면.

56 이명선,「魯迅雜感文選集〮序」,『이명선전집』,보고사, 2007, 3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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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루쉰잡감문선집』의 서언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공간에서 이명선 은 무엇보다 좌익진영에서 활동하던 루쉰의 후기 작품인 잡감문 속에 담긴 반봉 건적〮반제국주의적〮전투적인 비판정신을 중시하며 그것을 ‘투쟁의 무기’라고 강 조했다. 그는 한국의 당대 현실문제와의 연관성 속에서 루쉰의 전투정신을 부각 시키면서 본인도 사회적 실천운동에 적극 가담하는 길로 나아갔다.57 그러나 이 명선은 끝내『루쉰잡감문선집』을 출판하지 못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 는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58

3. 50-60년대 반공과 순수문학

1950-60년대는 냉전과 분단의 시기로 잘 알려져 있다. 2차대전 이후 냉전체제 가 형성되고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북한의 대결구도가 극대화되면서 남 북분단이 고착화 되었다. 3년간에 걸친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으로 끝났고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대립 속에서 여전히 휴전의 상태로 남아있다. 한국전쟁 시 중국의 북한 파병과 물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은 북한뿐 아니라 중국과도 대립하게 되었고 특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한국의 중국에 대한 적 대감과 거리감은 더 고조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미소간의 냉전 고착화로 한국사회에서 이념적 대립구조가 더욱 견고하게 형성되었는데 이로 인해 사회주의 진영에 속하는 중국과는 정치 적〮경제적〮문화적으로 단절되었으며 중국 현대문학 역시 한국인의 시야에서 점 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 루쉰에 대한 소개나 언급은 극히 제 한되었다. 즉, 1950년대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 중국의 사상적 상징으로 추앙받 는 루쉰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중국이 개혁 개 방한 뒤 상황이 호전되지만 1980년대까지 약 30년간의 연구의 단층이 있을 수밖 에 없었다. 특히 50-60년대에는 루쉰작품의 번역작업이나 비평이 극히 드물었다.

1963년에 출간된 이가원(李家源)의『노신소설선』(정연사) 하나만이 나왔을 뿐이 다. 이런 사정은 7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개선되어 루쉰에 대한 소개와 작품번

57 이명선은 1945년 해방 직후‘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구성되자 이 협의회에 참가해 문학 분과에서 활동했으며, 또 좌익 계열의 문학단체인‘조선문학동맹’이 결성되자 고전문학위원 회 서기장으로 참여했다. (홍석표, 앞의 책, 364면에서 참조.)

58 김준형,「길과 희망: 이명선의 삶과 학문세계」,『이명선전집』4,보고사, 2007, 552-5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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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